"보람있지만 아쉬움이 더 많아 1주일에 1만여권을 인쇄하기도"

전문인탐방 | 원광사 김신전 도무

김신전 도무(사진)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연세에 맞지 않게 수줍음이 많아 보였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나는 신문에 나올 인물도 아니고 할 말이 없다”며 손을 흔들고는 좀체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딴 데 가 보라니까요.” 그러나 그는 원광사의 터줏대감이다. 그 만큼 원광사에서 오래 일했던 인물은 없다. 1960년에 입사해서 아직 원광사를 지키고 있으므로 자그마치 43년 근속이다. 세월이 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원불교 교무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이 곳에 왔는데, 일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까 어느듯 세월만 갔어요. 원불교 공부를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워요.”

김 도무가 원광사에 입사한 이후 사옥이 4번 옮겨졌고 사장은 7번 바뀌었다. 그가 다니던 진안교당 교도들과 함께 총부를 방문하면서 원광사에 들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직장이 됐다. 고향인 진안에서 원래 인쇄소 일을 했던 터라 원광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 대학에도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익산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러나 일이란 것이 그를 한가롭게 놓아주지를 않았다.

원광사는 총부의 인쇄시설이다. 초기에는 ‘원광'지를 제작하는 조그마한 인쇄시설이었다. 그 후 전주에 가서 의뢰해 만들던 타블로이드 판 ‘원청회보'를 원광사에서 제작하면서 주조기를 들여오게 됐고 이로써 본격적인 인쇄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비로소 원광대 교지 ‘원광문화' 가 원광사에서 제작되기도 했다. 그가 원광사에서 살았던 세월은 인쇄방법이 급속도로 변화해 온 시대이다. 생각해 봐라. 기록매체조차도 타자기에서 전동타자기로, 전동타자기에서 워드프로세서로, 워드프로세서에서 컴퓨터로 바뀌어지더니, 컴퓨터는 또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원불교신문의 전신인 ‘원불교신보' 창간시만 하더라도 납활자 시대였다. 문선과 조판, 동판 제작 등 여러 공정을 거쳤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과정이 컴퓨터와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뚝딱' 이다.

원광사에서 김 도무가 가장 바빴던 시절은 원광대 카렌더를 만들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원광사에서는 완전 컬러가 되지 않았으므로, 서울에서 거의 모든 작업을 해와야 했다. 출장 빈도가 잦았다. 자재를 제작하거나 구입해서 익산에 내려와야 했는데, 운송료를 아끼기 위해 익산방향으로 내려가는 화물차를 수배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한 밤중이나 새벽녘에 익산에 도착하면 무거운 짐을 혼자서 낑낑대며 풀어야 했다. 종이뭉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때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실제로 무거운 종이뭉치도 요령이 있어야 제대로 들 수 있으므로, 설사 도와주는 사람이 옆에 있더라도 도움이 안됐다고 했다.

김 도무에게 43년 세월동안 가장 보람있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그것은 지난해의 일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난 해 연말을 일주일여 남긴 시점에서 신년행사에 사용할 양장제본 책 1만여권을 인쇄해서 납품한 일이 가장 보람있었던 일" 이라고 했다.

너무나 짧은 일정이라, 기계가 밤을 세워 돌아가고, 일요일도 쉬지않고 밤낮으로 각자가 맡은 범위에서 열심히 손을 모으고, 일부는 다른 업소의 힘도 얻어 이루어낸 작업 끝에 납품날짜를 겨우 맞추었다고 했다. 밤잠을 못 잔 채 책을 행사장에 들고 갔더니 너무나 마음이 뿌듯했고 직원들의 정성스런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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