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전 교도 / 오수교당
부모님의 밥상머리 싸움을 지켜보면서 항의하지 못했다. 그것이 분별하는 마음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싸우는 것이 일상화가 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싸움은 싫은 거야, 나는 절대로 안 싸울거야 무서워’ 이미 싸움이 무서움이라는 것을 직감해버렸다. 나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싸움이 무서워서 싸우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무식하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무식하면 안 된다는 분별이 있었다. 그래서 무식한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보여주기 싫어 자존심으로 무장하면서 살아왔던 것이 나의 생존법이었다.

엄마의 끊임없는 아버지에 대한 한풀이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못하고 증오했었다. 아버지를 증오했기 때문에 남편을 지켜주기 위해 내 자식들에게 남편의 못난 점을 혼자 삭히며 함구하고 살았다. 오로지 내가 정한 생존법을 지켜내기 위해 철벽처럼 나를 지키고 살아 왔다. 그것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자식들 앞에서 싸우지 않아야 했기에 참고 또 참았다.

무식하면 안되었기에 유식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엄마처럼 자식들에게 한풀이를 하지 않아야 했기에 자식들에게 남편의 단점을 함구하며 지켜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내 자신을 억압하고 살았다.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나를 지켜내기 위해 살았던 삶, 오로지 지켜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살았던 삶, 이런 분별은 이미 고통의 시작이었다.

부모님처럼 살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나 역시 결코 아이들에게 엄마의 행복함을 물려주지 못했다. 이미 참는 것에 이력이 났기에 참는 것에 에너지를 쏟느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고 억압된 분노를 아이들에게 투사하면 살았다.

무명에 가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했던 나의 삶에 이제 종지부를 찍는다. 부모님처럼 살지 않기 위해 방황했던 삶이었지만 마음공부로 인하여 내가 부모님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나의 생존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공(空), 현실 진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미 진리의 모습을 거부하며 살았고,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일임을 알았기에 현실의 진리에 순응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이제는 세상에 대해 주어졌던 분별의 힘, 그 힘을 빼고 있었다. 힘을 빼고 있는 순간 그것은 자유였다. 그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으니 내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세상은 나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이었다. 나는 분별하고 있던 나의 부정적인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렇게 나를 억압하며 방황을 했었다. 오랜 동안의 내면에 쌓아두었던 방황과 저항 끝에 부모님의 품에 다시 돌아와 안기는 행복감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참 감사하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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