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개미가 한 시간 이상 공들여 빵조각을 옮기고 있다. 공중을 날던 새가 빵조각을 나꿔채 가던 중 반 조각이 다른 개미 앞에 떨어졌다. 전후와 좌우밖에 모르는 2차원 세계의 개미로서는 공중(空中)에서 벌어진 일이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대종사님께서는 성리를 말 있는 것 만으로 능사(能事)를 삼을 것도 아니나 말 없는 것으로만 해결을 지으려고 하는 것도 큰 병이라 하셨으니(대종경 성리품25장) 우리는 3차원의 언어로 4차원-무한차원의 상황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천조의 대소유무와 불생불멸의 키워드로 색(色)과 공(空)의 관계를 규명해 보자. 색불이공 공불이색이기에 불생불멸이기도 하지만 선후를 논하자면 불생불멸이 먼저다. 불생불멸의 존재이기에 색불이공이고 공즉시색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른 관점일 수 있지만, 대종사님께선 무엇보다 급한 일 두가지 중 한가지로 '생멸 없는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셨을 것이다.(대종경 인과품 16장)

모든 법 모든 경전이 이 불생불멸을 이해함으로써 훨씬 쉽게 내 것이 된다.

존재 즉, '있음'과 '불생불멸'은 3차원세계에서는 동시적일 수 없는 말이다. 존재로서 어떻게 가(邊)이 없을 수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시작도 없고(無始) 끝날 때도 없이(無終) 존재할 수 있을까…. '있음'을 충분히, 그리고 확실하게 알면 '없음'은 저절로 해결되어질 것이다.

천지는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기 전이나 후나 '대소유무의 이치'로 건설되어 왔으며 또한 무시광겁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전 일원상의 진리장에서 "생멸거래에 변함이 나타나며"라는 구절은 없는 것이 당연하며 오직 만유차별의 원리인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서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날 뿐인 것이다.

진공과 묘유는 언제나 하나이며 인과 또한 여기에 함께하여 하나로 일원의 진리가 되는 것이니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며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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