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에서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특집으로 전통 문화 둘러보기를 연재한다. 일상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다양한 문화의 숨결을 느껴봄으로써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재발견하고 나아가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엿가락처럼 살림 늘어나 부자 되세요~

■ 엿은 가족과 이웃의 복됨을 비는 마음이 녹아있다

■ 창평 쌀엿은 바람이 잘 들어있어 아삭아삭하고 지나치게 달지 않아 조선시대 임금님이 즐겨드셨을 정도로 유명하다.

 

▲ 송장근(77)씨와 안주인 김정순씨가 보고있는가운데 아들 희용씨와 며느리 조성애씨가 엿을 늘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옛 빛이 살아 숨쉬는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이 되면 마을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분주하다. 엿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3월까지가 성수기라 더 그렇다.

설 명절이 지난 1월말. 창평에서 3대째 전통 쌀엿을 만들어온 송장근(77)씨 댁을 찾았다.

며느리 조성애(50)씨가 엿밥을 찌기 위해 깨끗이 씻어 불린 쌀을 시루에다 넣고 있었다. 고두밥을 찌기 위해서다. 남편 송희용(53)씨가 능숙한 솜씨로 아궁이에 장작불을 붙인다.

"가마솥에 불을 잘 때야 고두밥이 쪄져 식혜가 잘 돼요. 불 조절이 꼬들꼬들하게 밥을 쪄내는데 중요하죠. 옛날에는 짚불을 때면서 했지만 지금은 장작으로 땝니다."

전통을 이어 간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닐 터인데 외아들 희용씨가 이어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송장근 씨는 그 과정에 대해 설명을 덧붙인다.

"한번 배운 재주가 '골병 재준디' 아들과 매느리가 맹글겠다고 헝께 어쩌겠소, 그래서 해보라고 했소. 내가 6.25지나고 이 동네에 없이 들어와 열여덟에 어머이(소경애 작고) 한테 배웠소. 그땐 시방 망큼 먹을 것이 없어 헝께 밥이라도 얻어 먹어 볼까 해서 엿일을 배웠제. 옛날에는 이일을 품앗이로 다 했제, 시방은 힘들어서 사람들 구하기가 애러워. 엿 맹그는 거시 늙어서 골병드요."

그만큼 힘들다는 것. 녹록하지 않는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래도 송장근 씨는 대를 이어가는 외아들과 며느리가 기특하고 고맙기만 하다.

"우리 창평 쌀엿은 입안에 넣고 파삭 뿌사묵은 그 맛이 좋소. 그러고 입에 달라붙질 안응깨, 전국에서 모도 주문을 했싸요. 엿을 맹글라면 여섯이 한조가 돼야 혀. 엿 타래를 댕기믄서 짐을 잘 쐐야 바람이 들어가 구녕이 많이 생겨 묵을 때 파삭파삭 하믄서 입에서 녹아나제." 그의 엿 자랑이 정겹기도 하다.

 

▲ 송장근(77)씨와 안주인 김정순씨가 보고있는가운데 아들 희용씨와 며느리 조성애씨가 엿을 늘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같은 창평 쌀엿은 바람이 잘 들어있어 아삭아삭하고 지나치게 달지 않아 물이 켜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시대에 임금님이 즐겨드셨을 정도로 유명하다. 또 양녕대군이 이곳에 내려와 지낼 때 따라온 궁녀들이 그 비법을 전수해준 것이다. 이 지역의 현감들이 궁중에 상납할 선물을 마련하면서 제일 먼저 찾았다고 할 만큼 그 유래가 깊고 명성이 높다. 따라서 창평 쌀엿은 꿀과 달리 자연에서 얻은 단맛 가운데 엿기름으로 만든 깊고도 단백한 단맛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엿을 만들려면 엿기름 만드는 일부터 시작된다. 송장근씨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껕보리를 깨까시 시쳐서 물에다 두어 시간 정도 당가서 바구리에 건져 놔요. 그러믄 촉이나요. 촉이 나는 것을 그늘에다 두고는 아침저녁으로 디적그려서(골고루 펴서) 촉을 잘나게 해야 혀. 그거슬 방아간에서 찌어야 혀. 글고 쌀은 물에 당갔다가 건져서 시리에 얹혀놓고 꼬두밥을 쪄내요. 그 놈을 항아리에 엿기름 하고 섞어 넣고 따땃한 구둘목에 한 열시간 두먼 식혜가 맹글어 져요, 그걸 흰 강목 자루에 넣고 삭은 밥을 치데믄서 짜내요, 그 짜낸 물을 솥에 넣고 장작불에 끓이다보면 누런색으로 변하믄서 조청이 돼제. 그런디 솥에 누러붙지 않게 나무주걱으로 잘 저서야 혀. 너무 물러도 안되고 너무 되도 안되요. 질면 일을 허들 못혀요, 손에 달라붙어 가지고." 오직 자연의 시간이 더해 만들어진 어진음식이다. 그러니 뭐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얼마후 뜨거운 조청을 큰 그릇에 퍼내 열기를 식혔다. 누런 조청이 먹음직스럽다. 이것이 굳어지면 갱엿이 된다.

메주달린 엿방에 엿 늘이는데 전문가들인 윤순자(69) 할머니와 김분예(50)씨가 누런색의 갱엿 속에 생강과 참깨를 넣고 늘였다 줄였다 하는 초벌 늘이는 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아들 희용씨와 며느리 조성애씨가 부부가 넘겨받아 수십 번을 밀고 당기는 작업이 계속된다. 그러자 흰색을 띤 엿이 되고 있다. 이때 화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굳어져가는 엿을 잘 늘어나게 하고 바람이 잘 들게 하기 위해서다. 바삭함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또 잠깐 문을 열어젖혔다 닫았다를 거듭하며 온도 조절을 하는 윤씨 할머니. 밀가루처럼 하얀 쌀가루를 뿌려 달라붙지 않게 하고 마지막으로 송씨 어르신과 안주인 김정순(73)씨가 엿가락을 늘여 적당한 길이로 엿을 자른다. 기다림과 정성이 담긴 엿이 완성됐다.

엿은 지방마다 특색이 있다. 강원도의 감자엿, 고구마엿, 울릉도의 호박엿, 제주도의 꿩엿, 닭엿, 보리엿, 평안도의 수수엿, 밤엿, 깨엿, 충청도의 무엿 등이 유명하다.

옛날에는 설탕이 없어 엿이나 조청이 단 맛을 대표하는 식품이었다. 포도당이 들어 있어 두뇌활동을 왕성하게 해줘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식품이었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공부할 때, 또는 궁중에서 왕세자들에게 엿이나 조청을 먹였다고 한다.

또 엿에 콩이나 깨, 호박 등의 다양한 재료를 넣어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엿은 다양한 맛과 식감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저장식이었다.

 

▲ 엿을 알맞게 자르고 있다

 

선조들에게 엿은 꿀을 제외한 유일한 단맛으로 귀하디귀한 음식이었다.

옛 문헌에 엿은 부모님께 올리는 효를 담은 주전부리로 사용했다. 과거를 보러 떠나는 선비의 괴나리봇짐 속에도 엿은 빠지지 않았다. 이는 먼 길에 허기를 달래주는 비상식품이기도 했지만 끈적끈적한 엿처럼 시험에 철썩 붙으라는 기원의 의미도 있었다.

'잘 붙는다'는 특징을 가진 엿은 딸이 시집갈 때도 반드시 폐백의 이바지 음식으로 빠지지 않았다. 시어머니에게 '이 엿 드시고 이쁘게 봐주시라'는 의미도 있었다. 또 시집식구들이 공연히 새색시 두고 이러쿵 저러쿵 흉잡지 말고 이 엿 먹고 입 꼭 닫아 주시라는 뜻이 담긴 입막음을 한다는 등의 풍습이 아직도 통속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음력 2월 초하루 날은 머슴날이라 해서 '엿먹는 날'이 있었다. 요샛말로 하면 노동절이라 할 수 있다. 이날 주인과 일꾼이 엿가락을 둘로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하나'라며 엿처럼 끈끈한 '노사화합'의 정을 나눴다 한다. 그런 순수한 옛 선조들에게 엿은 그저 달콤한 주전부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새해가 되면 세배하러 가는데, 빈손이 아니고 달콤한 엿을 들고 찾아뵙는 것은 '인생감미 복덕밀접 연년장수(人生甘味 福德密(蜜)接 延年長壽). 인생은 엿처럼 감미롭고 복과 덕이 엿처럼(꿀맛) 착 달라붙으며 해마다 수명은 엿처럼 길게 늘어 오래사시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이렇듯 쫀득하고 단맛이 나는 엿, 그 속엔 가족과 이웃의 복됨을 비는 마음이 녹아있다. 우리 선조들은 엿에는 만복이 달라붙는다고 했다. 또 엿을 먹으면 엿 가락처럼 살림이 늘어나 부자가 된다고 했다. 이러한 복된 뜻을 담고 있는 엿은 이들의 정성스런 손길로 이어지고 있다. 요즘같이 힘들고 어려운 나라와 교단의 경제가 엿처럼 늘어나고, 이웃과 끈끈한 정을 나눠 훈훈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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