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빈자리 무엇으로 채울까?

장독대의 우두머리는 간장독
정한수 떠놓고 기도한 신성한 곳

 

▲ 그룹원 건축설계
    박도정 대표

 

이제 우리의 주거 환경은 주택(단독주택)이라는 이름보다 밀집형 아파트 세대가 전국적으로 훨씬 많아졌다. 어쩌다 주소를 물어올 때 무슨 동 몇 번지라고 말하면 "주택입니까?" 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만큼 소위 말하는 단독주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거 환경이 변하면서 바뀌고 변한 것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 '고향' 같은 단어를 떠올릴 때장독대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다.

어느 날 댐이 생기면서 수몰이 되는 곳을 찾았을 때, 모두가 떠나고 집들은 허물어져 흉물스럽게 변한 집 자리 한쪽에 장독대가 초라하게 남아 있고, 한 때는 소중했을 옹기 장독 몇 개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유년의 꿈과 고향을 동시에 잃은 허탈감을 맛보게 된다.

장독대란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 따위를 담은 항아리나 독이 놓인 데를 일컫는 말인데 중부지방에서는 '장독대' 북한에서는 '장독걸이' 남부지방에서는 '장독간' 제주도에서는 '장항굽'이라고 불렀다. 장독대나 장항굽이라는 말은 이곳이 평지보다 조금 높은데서 온 이름이다.

옛날 시골 어른들은 가정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장독 두서너 개는 반드시 준비해서 1년을 보냈다. 집안 형편에 따라 장독대의 규모도 달라 큰 집안 일수록 장독대의 규모가 크며, 한 줄에 4~5개씩 놓인 독이나 항아리에는 빈 것이 없이 모두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이러한 장독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장독대를 보는 것 만 으로도 고향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게 하였다.

장독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대체로 한적하고 볕이 잘 드는 뒷마당에 만드는데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경우에 따라 앞마당에 만들기도 하였다. 대개 긴네모꼴인 장독대는 부엌 뒷문과 가깝게 두었다. 돌을 2~3층 가량 쌓아서 1~2평 정도의 약간 높은 대(臺)를 만들고 맨 뒤쪽에는 큰 독, 중간 열에는 중간크기의 것들, 그리고 앞줄에는 항아리 등을 놓는다. 가지런하게 자리 잡은 이러한 모습들은 마치 군인들의 열병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이러한 장독대 둘레에는 철 따라 민들레, 채송화, 맨드라미들이 향기를 뿜어냈으며, 조무래기들의 숨바꼭질에 단골로 몸을 숨기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계집아이들은 장독대 주변에서 소꿉놀이 재미에 푹 빠지기도 하였다. 소꿉놀이 아이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소꿉놀이 밥상의 모래흙 밥과 가랑잎 반찬들이 오후의 햇살에 생기를 잃고 말라가는 모습이 정겨웠다.

어린 시절의 장독대를 기억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장독에 금줄을 치거나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놓은 것을 향수처럼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궁금해서 그 까닭이라도 물으면 어른들은 장맛을 망치는 잡신이 집안으로 들어오다가 버선본의 코가 위를 향하여 거꾸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간다고 일러주었다. 장을 담그는 이른 봄철에 우중충했던 겨울을 벗고 장독마다 깨끗한 버선본들이 붙게 되면 모든게 금 세 환해지는 것 같았다.

장독대는 냇돌을 되는대로 쌓아 놓은 것이어서 그 아래는 항상 습하였다. 그래서 이끼가 낀다거나 여러 가지 벌레가 모여들었는데 특히 여름철에 성하였다. 버선본을 거꾸로 붙이는 까닭은 그래야만 넓은 바닥 쪽이 위로 올라가서 되쏘는 빛의 양이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장독대의 우두머리는 단연 간장독이었다. 그 간장독에 간장을 담그는 일은 여인들에게는 가장 크고 소중한 일이었다. 예부터 '장 맛 보고 딸 준다'는 속담도 있고 '아기 서고 담근 장으로 그 아기 혼인 때 국수를 만다' 는 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은 장이 맛을 내는 기본이기에 솜씨가 뛰어나야 장을 잘 담근다는 말과 간장은 오래 된 것일수록 맛이 난다는 '진간장'을 말 한 것이다. 이러한 장맛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또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안주인만 바뀔 뿐 대대로 이어져 오랜 기간 가문의 손맛을 이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집집마다 대를 물려서 먹는 장맛은 그 집안의 살림 솜씨를 재는 기준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을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집안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말도 생겨났다. 그렇기 때문에 아낙들은 장을 담글 때 정성을 다하였다. <증보산림경제>에 보면 장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요, 인가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을지라도 맛좋은 장이 여러 가지가 있으면 반찬 걱정은 없다. 간장은 우선 장 담그기에 유의하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좋은 도리라.'

또한 정다산의 형인 정학유가 쓴 <농가월령가> 유월령을 보면 , '장독을 살펴보아 제 맛을 잃지 마소.맑은 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내어라. 비 오면 덮겠은즉 독전을 정히하소.'라 하여 장을 잘 간수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소중한 장들이 열병하고 있는 장독대는 신성한 공간으로 존재하였다.

예부터 이러한 신성한 공간을 관장하는 신을 이어 왔으니 호남 지방에서는 '철륭' 또는 '철륭할매'라고 부르고 중부 및 남부 지방에서는 '칠성'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어머니들은 이 신성한 공간에서 이른 새벽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과 집안의 안녕을 빌며 축원하였다. 또 객지로 떠난 아들이 그리운 어머니는 장독대에 빈 물레를 놓고 돌리기도 하였으니 물레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오듯 자식이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애틋함이 담겨있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 풍물패들이 집굿을 치면서 으레 장독대로 몰려와 '철륭 철륭 좌철륭 우철륭' 하면서 철륭굿을 쳐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성지역의 장독에 먼지라도 앉으면 아낙들은 어린아이 머리 감기듯 소중하게 물로 씻어내어 항상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게 하였다.

이미 잃어버리고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앞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아파트 문화는 장독대를 사라지게 하였다. 장을 스스로 담가먹는 사람도 부쩍 줄었다. 장독대 사라져 가는 것보다 행여 조상의 슬기와 지혜, 고향을 잃어가는 것이 더 두렵다.

'워낭소리'에서 잃어가는 것을 느낀 것이 장독대에서도 느꼈다면 잃어서는 안 될 것과, 찾아야 할 것도 같은 것이리라.

▲ 나종우 교수(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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