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문화 중심적 역할했던 소중한 자산

소와 쟁기는 불가분의 관계
쟁기질은 근력과 지구력 요구

▲ ①코두레 ②멍에③봇줄 ④한태 ⑤한마루 ⑥자부지 ⑦손잡이 ⑧잡쫓 ⑨보습 ⑩성에 ⑪까막머리
기축년(己丑年)인 올해는 소의 해이기 때문인지 연초부터 '워낭소리'처럼 소와 관련된 이야기가 어느 해보다 더 풍성한 것 같다.

소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아주 오래 전부터 다른 어떤 가축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 그건 지금처럼 고기를 제공하는 대상이 아닌 힘든 농사일을 덜어주는 유일한 동물이자 가족인 동시에 재산목록 1호였기 때문이다.
특히 농사일 가운데서도 사람의 힘만으로 버겁기만 하던 쟁기질을 대신하기 위해 선택된 동물이 바로 소였다. 수레를 끌거나 짐을 메는 일은 조랑말이나 나귀도 할 수 있지만 엄청난 근력과 끊임없는 지구력을 요구하는 쟁기질은 어떤 동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속조사 통계에 따르면 쟁기를 부르는 이름이 67개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쟁기문화가 그만큼 다양하게 발전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쟁기라는 명칭은 장글(고려가요 청산별곡), 잠개(월인천강지곡 1447년), 잠기(불설 대보 부모은중경 1553년), 장기(청구영언 1723년), 쟝기(자류주석 1856년) 쟁기(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서 1905년)라는 변천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대체로 쟁기라 하면 몸체를 이루는 '술'에 쟁기날이라 부르는 '보습'이 설치된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는 이보다 훨씬 다양한 부속들로 이루어져 있다(그림 1). 그 구성을 살펴보면, 술은 쟁기의 몸체에 해당하는데 곧거나 휘어진 형태이며 재질은 나무로 되어 있다. 보습은 술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하며 땅에 닿아 갈아엎는 부분이다. 볏은 보습의 위에 연결되며 보습에서 갈아엎은 흙을 옆으로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쟁기의 몸체와 소를 연결해주는 성에, 성에와 술을 연결하는 한마루, 소의 몸에 설치되는 멍에, 봇줄, 한태, 그리고 소를 조종하는 고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속도구들이 한데 모여 유기적으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던 때에는 모든 일을 사람의 노동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만 해도 밭갈이에 땅을 뒤집는 수준의 굴지구만을 사용하였으나, 점차 괭이나 따비와 같은 농기구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농작물의 종류와 재배 면적이 늘어나게 되면서 소형농기구만으로 땅을 가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괭이나 따비를 개량하여 원시적인 형태이나마 쟁기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쟁기의 출현 시점에 대해 서양에서는 대략 BC6000년 전으로 보지만 기본적인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BC4000년경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보고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갑골문을 통해 BC3000년경에 쟁기를 사용하였으며, 소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BC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중국의 쟁기가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나 바빌론 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북한에서는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의 진흙층에서 출토된 쟁기를 근거로 BC700년경에 이미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쟁기의 구조나 형태가 당시의 농사기술 수준과 맞지 않는데다, 주변지역의 농기구와 비교하더라도 큰 차이가 있어 이를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오히려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청동기에 따비를 이용하여 땅을 가는 모습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까지는 아직 밭갈이에 쟁기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비는 선사시대부터 땅을 가는데 사용되었던 농기구로 쟁기가 보급되면서 점차 이를 보조하는 도구로 계속 이용되었다.

청동기시대 이래 초기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쟁기나 보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 삼국시대가 되면서 갑자기 철보습이 출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사람의 힘으로 쟁기를 끌기 어려울 만큼 크고 무거운 철보습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으로 보아 대형의 철보습이 본격적으로 출토되는 5세기경에는 이미 소를 이용한 쟁기갈이가 널리 확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맥락과 함께 역사기록에서도 대체로 일치하는 부분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유리왕(24~57)조에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에는 지증왕 3년(502)에 처음으로 소(우경)를 이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발굴자료나 문헌기록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쟁기를 처음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소를 이용한 것도 5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쟁기는 다양한 지역성을 가지며 발전하게 되었다. 이제 현대의 쟁기는 기계화로 인해 지역이나 국가를 떠나 점차 표준화되고 있으며 재배작물의 특성에 따라 기능도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쟁기는 부르는 명칭만큼이나 다양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쟁기의 지역적 특성을 살펴보면 중국의 화북지방과 우리나라의 중남부지방에서는 하나의 쟁기를 이용하여 논갈이와 밭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함경도지역에서는 논갈이용 선술쟁기, 밭갈이용 연장, 이랑을 높이기 위한 가대기, 제초용 후치와 같이 구조와 용도에 따라 다른 쟁기를 사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평안도 지역의 쟁기는 '연장'이라 하는데 밭갈이 전용인 함경도의 가대기와 달리 논을 가는 데도 사용된다. 황해도 지역의 전형적인 쟁기는 '보연장'이라 하며 평안도 지역의 연장과 거의 차이는 없지만 형태가 중부 이남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써온 호리쟁기와 닮았다.

경기도 지역의 쟁기는 '귀보'이며, 경기 이남지역에서는 주로 '호리쟁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일본에서 들어온 개량쟁기에 밀려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수천년 전 이집트에서 시작된 쟁기의 역사는 대륙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지고, 다시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쟁기는 각 지역마다 무척 다양한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농경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충실히 해왔던 소중한 자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