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법천 교도·
진주교당(논설위원)
나에게는 좋아하는 두 분의 교무님이 계신다. 한 분은 내가 다니던 교당에서 시집 살이를 하시다 지금은 다른 곳에 계시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이웃 교당에 오신지 한 2년 남짓 되신 분이다. 그 첫번째 교무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분은 모습이 보름달 같아서 미인이시다. 많은 분이 늘 웃으시는 모습이 좋다고 하지만, 실은 늘 웃고 계시는 편은 아니고, 가을 호수처럼 잔잔하면서 그 내면은 서릿발 같은 차가움도 바탕되어 있으신 분이다. 천하장사 몇이 와도 그 묵중함을 엎어뜨릴 수 없는 중압감이 확실히 있으시나, 평상시는 언제나 훈풍처럼 하늘거리신다. 고정되어 있음이 없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부는 그 만큼 웃으시고, 꽃이 지면 지는 만큼만 일렁이신다. 그 바탕은 항시 거울처럼 맑고 밝아서 그냥 있는 그대로 일 뿐이다.

그리 크신 체구는 아니어도 어디에 서 있던 그 공간은 항상 꽉 차 있다. 그렇다고 늘 자기가 주인공은 아니다. 누구 앞에서나 자동으로 작아지시고, 화려한 곳에서는 언제나 맨 뒤거나 맨 아래다. 필요한 곳에는 언제나 먼저 와 계시고, 안 계실 자리에 끼어 있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분 곁에 가면 봄에는 꽃길이고, 여름에는 시골 우물가 같으시며, 가을에는 스산한 바람이시고, 겨울에는 따끈한 아랫목 같다.

그분과는 어떤 시비도 할 방법이 없다. 큰소리로 대 들어도, 무례하게 약을 올려 봐도, 아아니라고 주먹질(?)을 해 봐도, 살며시 "그러세요" 네 글자만 듣고 나면 다음은 허공이다. 허공은 정말 고리를 걸어볼 자리가 없다. 뒤돌아서 보면 내가 그 허공에 감싸여 있다는 걸 실감할 뿐이다. 나는 처음에 그분이 아닌것을 아니라고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과, 틀린것을 틀리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에 실망 하기도 했었다.

그런 것들에 분노하지 않는 도는 참 도가 아니라고 반발했다. 윗분들을 향한 절대적 순종을 고깝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안다. 그분은 언제나 모두에게 윗분에게 하는 딱 그만큼 하신다. 위도 아래도 아예 없다. 모두가 그분이 보듬어야 될 내 이웃 내 가족 내 동지일 뿐이라는 판단을 지금에야 동의한다. "아니다" "틀렸다"도 내 생각만 지우고 나면 '그러할 뿐' 아닌 것도 틀린 것도 없다. 일체는 순리 자연하여 다투어 버틸 것은 없고, 나에게 주어진 그 일 그 일만 힘껏하면, 그것이 틀린것에 대한 저항이고 ,아닌 것에 대한 부정이 된다는 걸 비로소 알아 냈다.

그래서 그분이 어디에 계시던 어떤 시간이던 나의 스승이시다. 그분이 앞에서 하시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어느 곳이든 두팔 걷고 뒤 따를 믿음이 있다. 그분의 생활이 곧 참된 공부법이고, 사업법이고, 교화법이다.

사업을 위한 사업은 참 사업이 아니다. 시끄럽고 갈라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파열음이 세상을 진동하는 요즘 같은 때에, 우리 원불교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스승을 한분이라도 더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정책을 펴 주는 것이다. 그러한 분에게서 튕기어 나오는 도의 맛과 덕의 향기만이 세상을 구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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