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법천 교도·진주교당(논설위원)
요즘처럼 작은 촛불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아 본지도 꽤 오래 된 듯하다. 촛불이란 참 단순하다. 작은 초 하나에 서로 서로 붙여 준 불이 피어나 좁은 공간을 밝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것들이 왜 세상의 이목을 받고 시시비비 꺼리가 되는지 그 까닭은 그리 단순치 않다. 촛불 속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밝은 빛으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촛불이 아니라 그것을 든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면 국민인 그들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걸까?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두 문장의 헌법 조항은 이 나라 존립의 근간이다.

민주란, 이 나라의 주인은 백성! 곧 국민이라는 뜻이고 어떠한 권력도 그 소유권은 국민에게 있기 때문에 누구도 국민의 위에 서거나 국민의 뜻에 반해서 그 권력을 행사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권력자는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를 수 없고 다만 국민의 뜻에 합당하게만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대의 민주주의다. 그들을 '공복' 즉 공공의 머슴이라고 일컫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선거는 그 머슴을 선택하는 절차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머슴은 주인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할 권한이 결단코 없다. 하물며 삶의 기본이 되는 먹거리가 안전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것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검역권도, 사전 현장 검사 감독권도 불량한 납품 업자를 거부할 권한 마저도 심지어 도축의 현장에 들어가 사진 하나를 찍고자 하는 주인의 권리마저도 제 멋대로 포기해 버린 행위나, 대다수 국민이 결코 안된다는 운하공사 마저 몰래 숨어서 추진하고 있는 당돌한 머슴을 추궁하는 준엄한 호통이 촛불이다.

소통이 부족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려는 노력이 부족 했다는 의미고 그러고도 법의 이름으로 주인을 폭행하는 머슴은 지탄 받아야 한다. 촛불은 말하고 있다 "머슴은 주인의 권리를 지키는데 충실하고 주인을 받들고 주인에게 겸손하라"고… 혹자는 종교는 현실 세계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 외람된 말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불의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의로운 영령들과 순교자들을 종교의 이름으로 모독하는 말이다. 최소한 종교는 자신이 주인인줄 잘못 알고 있는 머슴을 잘 가르치고 일깨워 줄 책무는 가지고 있다.

종교가 역사의 어른으로 있어야 된다면 자비와 더불어 준엄함도 같이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이번 일련의 상황 속에서 원불교가 보여준 행태는 밝고 맑고 바르게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교전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못 박혀 있다. 그런 우리가 경제라는 이름의 물질적 번영만을 최상의 선인 줄로 알고 있는 머슴이 주인의 참다운 권리와 정신을 몰락시키는 현장을 수수방관 하였다.

수 많은 종교인들이 밤을 지새우며 비맞고 기도하고 스스로 촛불이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싶다. 삼보 일배가 아니라 일보 삼배라도 했어야 될 상황속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겨우 발가락 하나만 담그고, 할 바를 다 한양 자위하고 있었다. 우리의 도리를 다 했더라면 일보는 도의 맛으로 삼보는 덕의 바람으로 만인의 귀감이 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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