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성 교도

아랫목에 손을 녹이던 구들문화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난방시설
찜질방 열광, 돌침대도 구들문화 습관

 

방 전체에 여러 줄의 고래가 지나가고 뒤에는 고래 위에 구들장이 덮인 모습이다.

 

몇 년 전 박물관에서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바로 집을 구하지 못해 잠시 찜질방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 며칠은 고시원에서 지내다 하루는 밤샘작업으로 지친 몸도 풀 겸 찜질방을 한번 찾은 뒤로는 마치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발길을 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좁고 어두침침한 방에서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권태로움 대신,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을 깨는 느낌은 마치 MT라도 온 기분이었던 것 같다. 어느덧 소음이 짜증으로 들릴 무렵 다행히 이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 후 한동안은 뜨끈한 찜질방 바닥이 간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찜질방문화를 유독 우리나라에만 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처럼 남녀노소가 모두 찜질방에 열광하는 것을 외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찜질방 문화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구들문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구들이란 말은 '구운돌'에서 나온 순 우리말로 이것을 한자로 바꾼 것이 온돌(溫突)이다.

흔히들 부뚜막과 구들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 아마 한옥이나 초가집처럼 전통적인 집을 생각하면 부뚜막과 구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부뚜막은 부엌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것으로 아궁이에 솥을 걸어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드는 부분을 말한다. 이와 달리 구들은 부뚜막에서 발생한 연기가 고래라는 통로를 지나가면서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부분이므로 방바닥의 난방시설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금의 구들은 부뚜막과 하나로 결합되어 사용되지만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부뚜막은 약 3천년 전 중국에서 처음 사용되었지만 구들은 약 2천 3백여년 전 지금의 러시아 땅인 연해주 일대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천년 전부터 부뚜막과 구들이 사용되는데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쓰이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결합되었다. 하지만 (동북지역 일부를 제외한)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부뚜막만을 사용하고 구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아 우리나라와 큰 차이를 보인다.

삼국시대까지의 구들은 그 형태와 기능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움집의 벽에 붙여서 구들의 고래를 설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구들을 한쪽 벽에만 만들면 'ㅡ'자, 두 벽에 만들면 'ㄱ'자, 세 벽을 따라 만들면 'ㄷ'자 형태가 된다. 이처럼 외줄의 구들이 벽을 따라 설치되므로 오늘날처럼 고래가 여러 줄인 구들과 구분하기 위해 '쪽구들'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구들은 방바닥을 데워서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지만, 쪽구들은 벽가에 설치된 외줄의 고래를 데워서 그 열기로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므로 오늘날의 '히터'나 '페치카'와 같은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좁은 쪽구들 위에서 오늘날과 같이 잠을 자거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아궁이를 중심으로 고래가 양 옆으로 빠져나가는 'T'자 형태로 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불길과 연기가 한쪽 보다는 두 쪽 방향의 고래로 배출시킬 때 방이 더 빠르고 고르게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외줄고래만을 이용하던 쪽구들에서 점차 고래를 방의 일부 또는 절반까지 넓게 설치하는 '반구들'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외줄고래의 열기로 방 전체를 덥히던 방식에서 고래가 설치된 방바닥을 덥혀 방 전체가 따뜻해지도록 하는 바닥 난방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고래 위로 사람이 올라가서 잠을 자고 생활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가 되면 이제 방 전체에 고래를 설치하는 온구들(또는 전면구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들이 바로 이 온구들이다. 온구들은 고래 위에 방바닥이 설치되므로 자연스레 바깥보다 방의 높이가 높아지게 된다. 이 때문에 외부와의 연결공간에는 마루를 설치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지금과 같은 구들구조가 완성되면서 세계 과학사와 농업사를 놀라게 한 일이 나타났다.

약 5백년 전에 흙집으로 온실을 짓고 바닥에는 구들을 설치하여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산가요록>이라는 책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토대로 지난 2002년에는 일부 연구자들이 구들온실을 재현하여 겨울에 식물을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침대를 많이 사용하지만 아직도 날이 춥거나 하면 뜨거운 방바닥에 허리를 지져야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바로 이러한 구들문화의 습관이 아직도 우리를 찜질방에 열광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입식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침대조차 돌침대나 흙침대로 재탄생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구들은 이제 세계적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태권도, 김치 등과 함께 온돌(Ondol) 이란 단어로 등재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고래 대신 온수파이프나 바닥전열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개량되어 유럽 등 구미각국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제 세계가 우리 구들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를 앞 다투어 사용하고 있다니 참으로 뿌듯하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어느덧 남녘에는 벚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아직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 밤은 따스한 아랫목에 손을 녹이던 어린 시절의 구들방이 더욱 간절하게 생각이 난다.

오진성 교도
   (한강문화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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