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음과 부드러움의 미학, 대숲 향기

"속까지도 다 비워버린 대나무의 욕심없는 모습
저 대나무처럼 텅 비워야 함을 깨우치게 해"

 

▲ 교구 바자회에서 교당 품목을 손질하고 있는 교도들.

 

'눈 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셔 굽다턴고
구블 절(節)이면 눈 속에 프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고려 말 원천석의 시조-세한고절.

사철 푸르고 곧게 자란다 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된 대나무, 일찍이 조상들은 대나무를 벗삼아 자연을 노래하고 풍류를 즐겼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문객들의 소재로 애용되기도 했다.

대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맑은 공기를 뿜어내서 시원함과 상쾌함을 우리에게 선사해 준다. 또한 시각적으로 장쾌하고 늠름한 아름다움을 보여줘 언제나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예품으로 만들어 우리 곁에 가까이 두고자 한다.

이러한 대나무는 한자로 '대죽(竹)'자를 쓴다. '풀초(艸)'자의 거꾸로 된 모양이라서 어떤 이는 대죽 자를 '거꾸로 된 풀'이라는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나무의 고장 전남 담양. 대나무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마을이 있다. 이로인해 담양은 대숲 향기가 사방에 흩날린다. 특히 5월 대나무축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대나무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담양은 죽물의 고장이다. 그래서 조상들은 대나무로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 초롱이나 등, 등잔대, 발, 상, 죽부인, 베개, 부채, 구덕, 지팡이, 도시락, 조리, 바구니, 그릇, 소쿠리와 채반, 키, 삿갓, 참빗, 반짇고리, 바작, 삼태기, 물레, 활, 화살통, 통발(쑤기), 대금, 단소, 피리, 심지어 굴뚝까지도 대나무를 원통 모양으로 엮어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옛날에는 대나무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이같은 환경 덕택으로 현재 담양에는 죽공예품을 생산하지 않는 마을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죽세공예에 종사하는 장인만도 1천여 명이 훨씬 넘고, 생산되는 죽공예품 종류도 7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담양에는 부채를 만들어 서울로 올려 보낼 만큼 성했다. 죽물의 거래가 활발하던 시기에는 '담양장에서 돈을 못 벌었다면 장사꾼이 아니다'고 할 정도였고, '팔다만 어물도 담양장에 가져오면 팔 수 있다'고 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시장에 나온 품목들은 소쿠리, 바구니, 광주리, 채반, 키 등 일반 민가에서 널리 쓰이는 생활용구들이지만 경기변동과 수요에 따라 출시되는 품목과 양은 영향을 받아 왔다. 아울러 예로부터 죽물의 시세와 담양장의 성쇠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장날이 되면 이른 새벽에 죽물 잔뜩 지고 오는 모습에 '호랑이도 무서워 도망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수요마저 끊기게 되었다. 생활용품의 재료가 플라스틱으로 바뀌고 대나무를 이용했던 각종 일의 과정이 기계 건조로 전환되면서 대나무 수요가 급감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요 감소는 일차적으로 죽물시장에 충격을 주었고, 점차 완제품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완제품 시장도 플라스틱 생활용품의 사용이 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더욱이 값싼 중국 및 동남아산 제품의 유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열악하게 변해가는 죽물시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양에는 아직도 죽세공예에 종사하는 장인은 1천호가 넘는다. 또 생산량은 58만9천여 점이나 된다.

 

▲ 교구 바자회에서 교당 품목을 손질하고 있는 교도들.

 

죽녹원 옆 향교리에서 6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장인 참빗장 고행주 씨를 만났다.

"대나무를 다루면서 손을 다친 일이 없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미소로 화답한다.
"60여 년간 대나무를 다뤄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상하는 일은 없죠."
그는 참빗에 대한 자상한 설명을 이어갔다. 참빗은 3~4년생 왕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대나무 뿌리 부분의 끌텅 서너 마디를 빼고 전체를 사용합니다. 대나무 마디를 절단하여 대통을 제작 칼로 쪼개서 겉과 속을 분류하죠. 이를 배를 뜬다고 합니다. 서 너번 배 뜨는 과정을 거쳐 12~13mm 두께가 되면 참빗길이 만큼 자르고 또다시 피죽을 흩어냅니다. 빗살 두께 0.4mm 가 되면 빗살을 맬 준비가 된 것입니다. 좋은 빗살은 최대한 대가 가늘어야 합니다. 무명실로 빗살 100여 개를 엮어, 6~7시간 염색을 한 후, 위아래로 하얀 댓살을 댑니다. 참빗 하나가 완성되는 시간은 20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이처럼 100여 번 손이 가는 참빗이지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이런 참빗이 한두 개씩은 다 있었다. 이나 서캐를 잡는 데는 발이 촘촘한 참빗이 최고였다. 쪽진머리를 빗을 때도 참빗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이가 사라지고 서캐가 사라지면서 참빗도 덩달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플라스틱 빗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현대인들에게 전통빗인 참빗을 사랑하자며 한마디 던졌다. "빗은 미의 가장 중요한 머리를 다듬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플라스틱 빗이 나오기 시작했죠. 머리를 빗을 때 정전기가 일어나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빗은 정전기도 없고 두피에 닿을 때 시원하여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줍니다." 그는 건강에도 좋은 참빗을 애용하자는 것이다.

가업을 이어 오늘날까지 참빗을 만드는 향교리. 그가 다시 공예품을 만들며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알기로는 몇 백년 전부터 죽제품을 만들어 썼다고 해요. 한 마을에 한 품목씩 개발을 했죠. 마을마다 공예품이 세분화 되어 있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말해요. '나 채반하나 만들어 달라, 죽부인하나 만들어 달라'고 성화였죠. 하지만 우리 마을은 30~40호 가구가 참빗만 만들어서 그것밖에 만들 줄 몰라요."

대나무공예품은 그 마을의 특산품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도 광주리는 담양읍 오계리에서 만들고, 부채는 객사리와 만성리, 찻상은 양각리, 채반은 용면 장찬리, 죽부인은 객사리와 양각리, 대자리는 향교리, 오룡리, 수북면 대방리, 바구니는 오룡리, 동산리, 오계리 등지에서 만들어 지고 있다.

그가 30년 전의 일을 꺼내놓으면 너털웃음을 웃는다.

 

▲ 교구 바자회에서 교당 품목을 손질하고 있는 교도들.

 

"담양에 참빗조합이 있었습니다. 장날에 조합으로 외지사람들이 참빗을 사러 몰려 왔거든요. 겨울에 참빗 1천 여 개를 동구리에 담아 동구리 500개를 매고 가다가 눈밭에 미끄러지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넘어지면서 눈밭에 쏟아진 빗을 다시 담는데 정말 춥기도 했죠. 옛날에는 다 그렇게 참빗 만드는 일부터 내다 파는 일까지 전부 수제(手製)로 했죠. 지금 참 세상 좋아진거죠. 하하하."

참빗장 고 씨는 60여 년간 담장 너머 죽록원의 푸른 대나무를 바라보며 느낀 점이 있단다. "속까지도 다 비워버린 대나무의 욕심 없는 모습, 추위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을 보며 나도 저 대나무처럼 텅 비워야 함을 깨우치게 한다." 그 대나무를 소재로 참빗을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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