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등의 이해와 기원

전통등은 전통놀이와 연등제로 전승
연등축제와 제등행렬로 대중화

 

▲ 중앙총부 영모전 광장에 대각개교절 법등축제에 출품된 사슴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90년대 초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하면서 장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갈 무렵, 나는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봉은사를 우연히 찾았다가 일주문을 따라 줄에 매달린 분홍색 연등을 보고 일종의 영감(靈感)을 얻었다.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무언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벌써 15년 가까이 전통등(傳統燈)의 연구와 복원에 매달리고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그 후로 한국의 등(燈)과 세계 각국의 등 연구와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전통등과 함께 한 세월이 나의 천직(天職)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대학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학교행사에나 쓸 일회용 걸개그림 아니면 졸업하기 위한 표준적인 작품에만 몰두했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전통등과 씨름한 세월 속에는 많은 지인과 연구원들이 있었다. 처음 전통등과의 인연이 선배들의 권유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일이 내가 뜻하는 대로 모두 성사되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중국의 극평가인 김성탄이 지은 <서상기(西廂記)>에서 "가슴 속의 뛰어난 재능과 눈썹 밑의 신안(神眼)이 중요하고, 사물을 느낄 줄 아는 마음과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추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평한 바와 같이 많은 분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지만, 전통등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직까지 일천하기에 더욱 여러 사람의 도움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전통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삼국사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신라 경문왕 6년 정월 15일의 "황룡사에 행행하여 간등(看燈)하였다(幸黃龍寺看燈)"와 진성왕 4년 정월 15일의 역시 같은 기록에서 한국의 전통등에 관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동경(지금의 경주) 황룡사의 연등(燃燈)에 관한 기록이 전통등의 기원으로 파악되지만, 등놀이에 관해서는 북한 학계의 고구려 기원설을 꼽을 수 있다. 4세기 중엽 고구려 벽화 등에 이미 '의례용' 등롱(燈籠)이 등장하고 있다. 등롱은 처음에는 조명용으로 이용되고, 이어 장식용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왕들의 위용을 나타내는 의례용으로 사용되는데, 4세기 중엽 안악3호분 대행렬도 등에 이미 의례용 등롱이 나타나므로, 이를 우리나라의 의례용 등놀이의 시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벽화의 등롱 외에도 동동등이 그려진 고구려계 가사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신라와 고려시기에 활발했던 연등회(燃燈會;부처님을 섬기는 국가 차원의 불교의식이었지만 민간에 더 많은 영향을 줌)가 종교적 의례로서보다는 국가적 축제로서 전승되었다. 고려시기의 연등회는 기본적으로 신라 중하대 이래의 신년맞이 축제로서의 연등회를 계승했다. 신라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왕건의 <훈요십조>의 기록이 상세할 뿐 아니라 그 설행 절차도 자세하게 남아 있어 오늘날 연등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팔관회(八關會;산천과 조상을 섬기는 고유의식으로 주로 궁중에서 행해짐)와 더불어 국가적인 불교행사가 기록상으로만 1000여 회 이상 거행되었고, 각종 도량, 법회, 재회 등 행사의 종류도 100여 가지에 이른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정월이나, 이월 보름에 행해진 연등회는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행사가 아니었고, 전래의 등놀이와 불꽃놀이와 중국에서 전래된 신년 등축제 그리고 불교적 등공양이 혼합된 국가적 세시명절이었다. 더구나 4월8일이 아닌 날짜에 달았던 연등을 부처님오신날에 달았다는 것은 고려 의종 때의 백선연이 "부처님 생일에 별원에서 점등하고 복을 빌었다"<고려사122, 열전35>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무인정권기의 최이, 공민왕 때부터 4월8일을 기해 사찰과 궁궐 등에 연등을 걸어 놓은 전통의식이 정착되었고, 이는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4월8일 행사로 정착되었던 연등제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면서 불교적인 행사와 색채가 축소되거나 폐쇄되는 국면을 맞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에는 "본조의 풍속에 4월8일을 부처의 탄생일이라 하여 연등과 관등놀이(觀戱)를 행한 지 오래 되었는데, 요즈음 간원에서 폐를 말하고 파하기를 청하였다. 내 생각에 오래된 습속을 갑자기 쉽사리 고칠 수 없으나 오직 이 습관만은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절(僧舍) 이외에서의 중외(中外) 연등은 일체 금하라…(세종 13년 4.6)"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왕조에서 연등제를 단순히 불교행사가 아닌 태일성(太一星)을 숭배하는 행사로 간주하여 그 규모를 축소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 '성종조(태일성 천궁)'의 기록과 같이 국가 차원에서는 사라졌지만, 민간에서 꾸준히 연등행사가 치러지면서 계속되었다. 조선 성종 때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의하면, "옛날부터 봄이 되면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기(旗)를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떼를 지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등불을 켜는 기구를 가지고 구걸하는데 이것을 호기(呼旗)라 한다. 음력 4월 8일 즈음에는 집집마다 장대를 세워 등불을 걸었으며 부호들은 크게 채색한 등대(燈臺)를 세웠다. 층층이 달린 그 많은 등불은 마치 하늘에 펼쳐진 것과 같아서 도읍 사람들은 밤새도록 구경하였고, 무뢰한 젊은이들은 등대를 건드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말기 박주대가 지은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시에는 "4월이면 개천에서 연등놀이가 펼쳐지는데, 제각기 만든 연등은 온갖 재주를 자랑하네. 하늘 높이 바지랑대에 연꽃등이 매달리고, 바람 타고 꼬리치며 잉어가 올라가네"라고 연등놀이에 대해 표현했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연등놀이를 한다고 해도 옛날에 번성하던 것과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놀이와 연등제로 전승된 전통 등문화는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던 초기에도 민간의 주요한 민속 문화로 이어져 왔지만,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불교만의 행사로 축소되고 말았다. 해방이후에는 더 이상 민속놀이로써의 그 의미는 퇴색되고, 연등은 불교의 법구(法具)로서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등은 삼국시대 김유신이 사용을 했고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시에는 등이 군사용으로 사용되었거나 현재까지도 혼례와 제례 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같은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서울의 종로와 청계천을 비롯해 많은 곳에서 연등제가 열리고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로 성행한 연등놀이는 1975년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지정된 이후 법요식과 제등행렬 등으로 공식화 되었다.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현대적인 축제화가 모색된 것은 1996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종단 차원의 '연등축제' 행사가 연등놀이와 제등행렬을 통해 대중화를 이루는 한편으로 전통등연구회(초대회장 백창호)가 결성되어 전통등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와 함께 재현, 복원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창작적인 요소까지 가미되는 등 전문가들이 많이 배출됨에 따라 아름다운 우리문화의 재발견으로 이어지고 있다.

▲ 백창호 연구원장/한국전통등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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