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바와 같이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空)이다. 흔히 공을 이야기 하면서 1×0=0, 2×0=0, 3×0=0 ··· 10,000×0=0이어서 만물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논리로 설명하는 수가 있으나 이것은 조금 서투른 표현이다.

현상인 만물을 지워 없애야 비로소 실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분별의 문제만 있을 뿐 현상이 곧 실상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현상을 떠난 실상의 다른 세계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무상으로 보면 무상으로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유상으로 보면 유상으로 무량세계를 전개하였으니 무상이 곧 유상이고 유상이 곧 무상이지 무상 외에 다른 유상의 세계가 있지 않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신앙 불교, 학자 불교, 실행 불교를 다 갖춘 불법이 참 불법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학문적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수학적으로 모든 숫자의 제로승은 1이며 심지어 미지수 X의 제로승도 답은 1이다.(X0=1)

그러므로 반야심경의 공을 굳이 숫자로 응용하여 보이려면 0을 곱할 것이 아니라 영승으로 함이 옳다.

반야심경의 공은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이며, 무(無)의 공이 아니라 무유(無有), 무무(無無)의 공으로서 분별이전의 하나자리이기 때문이다.

10=1, 20=1, 30=1 ··· 10,0000=1 로 만물의 제로승은 1이라고 표현함이 훨씬 수학적이며 그리고 성리적이라는 말이다.

본원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현상이 나온 것이 아니라 현상은 언제나 본원과 더불어 있고 본원과 더불어 없는 것이다.

이는 '있고 없음'의 문제가 세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분별 여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 즉, 무(無)가 있다는 말이니 아직도 완전한 무가 아니다. 완전한 무이려면 이 무마저 없는 무무(無無)이어야 한다.

이 자리는 있으면서 없고 이면서 아닌 자리(無無亦無無 非非亦非非)밖에 없다.
언어도단의 입정처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자리가 바로 이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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