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를 꾸미는 화려한 관모冠帽

예복입을때 양반가는 화관, 서민층은 족두리
전통혼례로 가정의 법도 세워도 좋을 듯

 

 

족두리 쓰고 시집가던 날의 설레임을 한마디로 표현한 박선아 교도(35·개봉교당)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 될 것이라고 예상 했다"는 그는 막상 결혼식에서 폐백을 드릴때 잠깐 써보았던 족두리는 멍한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긴장을 한 탓이었다"고 표현했다.

신혼 여행을 마치고 안정을 찾고나서야 막연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것도 족두리 쓴 폐백 사진을 보고나서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볼 일인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전통 혼례도 참 이색적이고 괜찮을 것 같아'라는….

이런 족두리 이야기는 고려 충렬왕 이후 신부의 연지 찍는 법과 남자가 옷고름에 차는 장도와 함께 몽고의 풍습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고고리(古古里)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족두리의 관명(冠名)이 고고리의 음에 가까워서 생겨난 잘못된 말이라고 한다. 또 화관(花冠) 운관칠보(雲觀七寶)의 제도가 있다 했는데 족두리와 화관은 고려 중엽 이후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려 중엽 이후에서 말엽에 걸쳐 몽고족인 원나라와 혼인이 많았던 관계로 원나라의 궁중 제도가 고려 궁중에 들어와 조선의 궁중 양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임하필기>와 <문헌비고>에 족두리는 광해군 중기부터 다시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검은 비단으로서 거죽을 하고 솜을 넣고, 그 속은 비었고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들어오기는 했으나 광해군 중기에 국건이 되다시피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조선 중엽에 들어 가체의 사치가 날로 심해지자 나라에서 이를 금하고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게 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오늘날 풍속에 혼례 할 때 머리를 장식하는 것과 홍색 장삼의 제도는 명승(明昇)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영조(英祖)가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면서 이것이 족두리가 일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족두리 중 민족두리는 장식이 없는 것이다. 칠보족두리와 꾸민 족두리의 모체이다. 이 민족두리 위에 장식을 꾸미기에 따라 예장용, 혼례용에 사용되는 꾸민족두리 또는 칠보족두리가 된다. 민족두리는 대개 제사 지낼 때 사용하여 제사족두리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국기(國忌) 복식에서도 같았다. 제사 민족두리를 쓸 때는 댕기 역시 검은색이고, 비녀도 검은색의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을 사용하였다.

꾸민 족두리란 민족두리에 폐물이나 구슬 등의 장식물로 꾸민 족두리이다. 주로 옥석을 밑에 바치고 산호와 밀화구슬과 진주를 꿰어 만들었는데 특정한 형식이나 법보다 형편에 따라 호화롭게 꾸며 부인의 예장용으로 사용하였다. 앞에 술이 있는 것은 혼례용에 주로 사용되는 신부족두리이고, 술이 없는 꾸민족두리는 부인의 예장용 족두리이다. 그리고 꾸민족두리 중에서도 노론 집안의 족두리가 소론 집안의 족두리보다 화려한 것이 많았다.

칠보족두리는 꾸민족두리의 일종으로 금박을 박고 여러 가지 패물을 꽃 모양으로 만들어 꾸미고, 칠보를 입힌 여러 가지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것이다. 보통 혼례용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혼례용 족두리일 경우에는 뒤에 댕기가 달리고 앞에 진주와 산호를 엮은 술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예장용으로 꾸민 칠보족두리에는 뒷부분의 댕기와 옆에 달린 술이 없다.

흰족두리는 속칭 소(素)족두리라 한다. 이것은 민족두리를 백색목면으로 싼 것이다. 이 흰족두리는 초상 때 부녀자의 관으로 사용하였고, 소상 때도 역시 착용하였다. 소(素)족두리를 착용할 때에는 머리에는 백당지(白唐只)를 드리고 비녀는 외상(外喪)에는 대나무를, 내상(內喪)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비녀를 하였다. 대개 부인의 관은 탁색(卓色) 족두리이고 탁색당지(卓色唐只), 비녀는 흑각(黑角)용으로 하여 기제사 때 복식과 같았다.

족두리를 사용하는 데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세자빈은 가례 때 칠보족두리, 왕자 부인이나 공주, 옹주들은 목단색 공단 족두리를 쓴다. 공단 족두리는 목관, 산호, 진주패가 있고 목란(木蘭)을 수놓은 위에 산호나 진주를 박은 것이다.

족두리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영조 32년에 사족부녀자들의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한 이후이다. 가체에 큰돈을 소비하였기 때문에 시비가 분분하고 사치가 날로 심해지자 족두리로 대용토록 한 것이다.

정조 12년에도 족두리에 금·옥을 못 달게 하였으며 정조 17년에도 민간에서 족두리에 다시 칠보장식을 사용하므로 금지하는 법을 또 내렸다. 그러나 족두리는 쉽게 없어질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혼식에 신부를 꾸미는 데 족두리를 대신할 만 한 것이 우리 민중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화관(花冠)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반가(班家)에서는 혼례나 경사 때에 대례복이나 소례복을 입고 착용한 수식물이다. 화관의 처음 사용은 신라 문무왕 때부터였고, 족두리와 마찬가지로 영조 때 가체금지령으로 가체를 대신하게 함으로써 일반화 되었다. 예복을 입을 때 양반가에서는 화관을 쓰고, 서민층에서는 족두리를 썼다.

요즘 족두리를 쓰는 경우는 공연을 하거나 결혼식에서 폐백을 드릴 때이다.

결혼 3년째에 접어 든 안종명 교도(34·화곡교당)는 "족두리를 쓴 신부의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운동회 때 꼭두각시 춤을 추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며 "연지 곤지 찍고 예를 올리는 신부에게 평소와 다른 품격있는 고귀함이 풍겨져 나왔다"고 말했다. 또 "족두리를 쓰고 고개를 숙인 신부 옆에 서니 신랑 역시도 수줍음과 설렘의 마음이 가득차면서 책임감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고 당시의 느낌을 말했다.

예를 갖추고 부모님께 큰 절을 올릴 때, 진정 부부로 느껴지며 가장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람들.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예를 올리는 과정에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내가 되었다는 책임감을 갖는다.

요즘 자녀들이 부모의 은혼식을 맞아 이벤트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보통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사진관에서 손쉽게 웨딩 촬영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전통 혼례 세트가 갖춰진 스튜디오도 많이 있다. 특별한 날을 맞아 기품있는 전통혼례를 통해 가정의 법도를 다시 세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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