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다. 아침저녁으로 나는 산길을 달린다.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꽃송이를 도로로 늘어뜨린 아카시아, 그 볼품없는 나무의 꽃내음이 열어놓은 차의 창문으로 비릿하게 진동한다. 나는 한동안 무엇인가에 유혹당한 설렘으로, 참지 못하고 홍등가를 배회하는 사람처럼 묘한 착각에 빠진다. 아무래도 6월은 아카시아의 계절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고 했던 임권택의 이야기를 해보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좌에 선 아버지와 삼촌 때문에 그의 삶은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17살에 가출하여 군화 수리점에서 일을 했다. 그때 그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그 군화장사꾼이 영화사업에 뛰어들면서 그도 덩달아 영화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에 데뷔하여 지금까지 100편을 만들었으니 그의 말처럼 '살아가는 일이 영화를 만드는 일이요 영화를 만드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됐다. 그에게 영화가 없었다면 결코 그는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은 날마다 한을 쌓는 일을 영화로 승화시켜 한으로 부터 탈출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서편제>에서 신드롬까지 가는, 당시에 한국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워 영화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그의 98번째 영화 <취화선>으로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여 자기예술의 완성을 알렸다.

이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임권택의 다음 선택은 뭘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서편제>에서 송화는 끝내 득음한다. 동생을 만나 통곡같은 소리로 그동안의 한을 풀어 헤치는데, 그게 바로 득음이 아니겠는가. 다음날 그녀는 또다시 길을 떠난다. 길은 도(道)다. 그 길은 깨달음이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요. 허무의 세계로 빠져드는 길이다. 그런데 그 후에 <취화선>에서의 도는 또 달랐다. 이 영화는 오원 장승업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그도 임권택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천민 출신으로 어려서 고아가 됐고, 양반집 머슴으로 들어가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우면서 천재성을 보였고, 마침내 고종의 부름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지만 기행을 일삼다 홀연히 사라졌다.

영화 속에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당당했던 그는 '아름다움의 세계와 합일하고자' 도자기의 굽는 가마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몸을 불살랐다. 이제 송화나 장승업처럼 임권택도 떠날 차례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다음 작품으로 보여 질 것이다.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렸다. 세상을 끝낼 것처럼 천둥 번개도 쳤다.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애써 안심하며 무심해지려고 애썼다. 그렇게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뒷문을 여니 산과 논이 안개에 묻혀 신비롭게 보였다. 그때 뻐꾸기가 울었다. 뻐꾹- 뻐꾹- 비온 뒤라 그 소리가 투명하게 맑았다. 그래서일까. 그 울음이 너무도 애절했다.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 새도 어제 저녁에 무슨 큰일을 당했는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보다 더 슬플까. 날마다 통곡을 해도 부족하고, 날마다 조문해도 미안하고. 그래서 하염없이 무너지는 가슴. 그가 떠난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바람처럼 서성이는 허무. 이제 어이 할거나.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그의 한을 언제 풀어 줄거나. 아직도 우리는 봉하마을 그 길을 지나 부엉이바위에 머물러있다. 그대로 시간은 거기서 정지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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