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포물에 머리 감고…

더불어 살아오던 공동체 의식 순수하고 아름다워
창포물로 머리 감는 뜻은 우주의 양기운으로 심신재계

 

▲ 출판도시 활판공방/ 값5만원

 

노란 붓꽃이 피었다 지면 물가에 창포가 오른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계절 오월에, 물가에 초록으로 올라오는 그 긴 잎들은 옛 여인들의 자태를 닮아 있다. 어쩌면 오월, 창포, 연못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우리는 단오라는 아름다운 옛 세시풍속에 대한 그리움을 건져 올리는지도 모른다.

오월이라는 계절의 여릿함 때문일까. '단오'를 떠올리면 어쩐지 여릿하고 나긋나긋하다. 그래선지 여인들의 아리따운 자태가 생각나고, 긴 머리채를 창포물에 감는 그녀들의 모습이 햇살 아래 어른거린다.

 

▲ 출판도시 활판공방/ 값5만원

 

<동동>의 한 구절이다. 단오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단오는 단오절(端午節),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五節), 단양(端陽) 등으로 불리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고 한다. '수리'를 '신(神), 상(上), 고(高)'의 의미로 보기도 하고, '태양'을 상징하는 말(태양처럼 둥근 수레바퀴)로도 보는데, 대체로 단오의 여러 명칭들은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하고 신성한 날'을 의미한다 하겠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상고시대에 영고, 동맹, 무천 등의 제천행사가 있었다. 이때 군중들은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와 음주를 즐겼다 하며, 남쪽의 삼한(三韓)에서는 오월과 시월에 제천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5월에 행하는 행사가 모내기 등을 끝내고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의 장이고, 이러한 시절풍속이 단오명절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오명절에 있어서 음식풍속을 빼놓을 순 없다. 봄이 무르익고 태양이 승한 오월 단오절에, 창포가 무성한 물가에서 물맞이 놀이를 하며 풍성하게 열리는 열매와 약초들로 만든 시절음식으로 액땜도 하고 즐겨먹었던 우리의 음식풍속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동시에 생각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런 세간의 풍요롭고 따스한 옛 풍정들은 작금에 와서도 잘 계승되고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낳는다.

단오에 행했던 민속놀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네뛰기와 씨름이 퍼뜩 떠오른다. 내 어린 날 기억 속에도 단오에 대한 아름다운 영상이 들어 있는데, 높디높은 노송가지에 튼실한 그네를 매달고, 동네 처자들이 그네를 뛰는 모습이다.

 

▲ 단오축제에서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모습.

 


정읍 화해의 내 고향집 옆에는 우리 집 소유의 아담한 소나무 숲이 있었다. 숲 앞쪽에 키가 크고 우람한 소나무 두 그루가 그네를 매는 기둥이었다. 치맛자락을 날리며 누가 더 높이 오르나 놀이를 하는 언니들과 친척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던 유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그 그네를 탔는지는 기억에 없다. 앞쪽의 소나무들은 내가 자라면서 없어졌고, 앞 언덕은 밭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서른 그루의 노송만 조선화가의 그림 속 풍광처럼 남아 있다.

어쨌거나 단오는 현재에 와서는 각 지역 민속축제의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전주에서는 매년 풍남제 기간에 덕진공원을 중심으로 비교적 큰 단오행사가 열린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기로는 2005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된 강릉단오제, 영광 법성포 단오제도 유명하다. 경북 경산에서는 중요 무형문화제 제44호인 '경산자인단오제'가 열리고,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도 남산골 단오민속축제가 열린다. 그밖에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국악원, 민속촌 등에서도 다채로운 행사와 단오부채 나누기, 단오 풍속전, 풍물 수리굿 공연 같은 공연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밝음을 지향하고 태양신을 숭배해 온 백의민족이기에 태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게 작용하는 수릿날을 신성한 날로 여겼으리라. 약쑥과 익모초 등도 수릿날 뜯어 말린 것이 가장 약효가 높다고 하며, 같은 수릿날 중에서도 특히 양기가 가장 왕성한 시각인 오시(午時:오전 11시 ~ 오후 1시)에 채취한 약쑥을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면 재액을 물리친다 한다. 또한 창포주(菖蒲酒)를 마셔 재액을 예방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 창포물로 머리를 감는다 함은 우주의 맑고 밝고 왕성한 양(陽)의 기운으로 심신을 목욕재계하는 뜻으로 이해된다. 한마디로 이 수릿날은 수레바퀴처럼 둥근 태양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즐겁게 공동체의 축제를 만들어내는 날인 것이다.

오월은 열두 달 중 으뜸으로 찬란한 달이다. 오월에 열리는 단오절은 조선 시대에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 고유의 4대 명절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이제 그 명맥이 위태롭기만 하다.

서양에서 들어온 화려한 기념일(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등)에 우리의 명절이 빛을 잃어가고 있고, 지금은 지역의 민속행사로나 간신히 이어지고 있을 뿐이니 옛것을 다시 회복하고 즐기고 이어가기 위한 거시적인 대안이 민족문화적인 차원에서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옛 우리 조상들의 더불어 살아오던 공동체 의식은 우주와 자연의 모습처럼 순수하고 아름답다. 또한 풍요를 기원하고 나누며, 공동체 정신을 싹틔우고 가꾸고 길러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계승했던 그 소박한 질서와 의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고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오월 단오가 되면 여름철 세시풍속을 즐기는 남녀들의 '단오풍정'을 볼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게 될까? 보기만 해도 미소가 떠오르는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떠올리며, 판소리 '춘향가' 중 단옷날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 한 토막을 베껴 적어본다.

'장장채승(長長彩繩:오색의 비단실로 꼰 긴 동아줄) 그넷줄 휘늘어진 벽도(碧桃:선경에 있다는 전설상의 복숭아나무) 가지 휘휘칭칭 감어매고, 섬섬옥수 번듯 들어 양 그넷줄을 갈라 잡고, 선뜻 올라 발 굴러, 한 번을 툭 구르니 앞이 번뜻 높았네. 두 번을 구르니 뒤가 점점 멀었다.'

 

▲ 한지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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