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의 길, 고난의 길에서 만난 행복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바보 행진 하고파
제생의세 가르침 실행하는 것이 이 공부 이 사업

대산 김대거종사가 교단에 펼쳤던 경륜과 유훈들은 큰 산이 되어 후진들 가슴에 남아 든든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이에 본사에서는 6월 추원보본의 달을 맞이하여 재가 교도들의 대산종사 추모담을 통해 성현에 대한 추모의 정을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편집자주)

진리는 우리에게 깊은 희열과 마음의 평화를 심어주지만 그 진리를 체득하기 까지의 고난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산종사는 '구도를 위한 고난의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으셨고 늘 '행복한 사람'이라 했다.

지금 그 고난의 길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하늘보다 더한 은혜를 받든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이 너무나 빚만 많아서 걱정이다. 법기로 공덕자로 자라기를 바라셨을 텐데 성장이 늦은 것이 죄스럽다"고 말하는 이천교당 최병오(66) 교도.

"서른다섯 살, 느즈막이 입교하여 생각해 보면 저와 아내(구덕행 교도)는 너무나 넘치는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황영규 교무와 황직평 원로교무의 국한없이 인도해 주신 큰 은덕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최 교도는 입교 초기 원기65년경부터 대산종사께 신년 인사를 올리러 다녔고 그 덕으로 공부 재미에 푹 빠질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신도안, 원평, 완도, 벌곡, 왕궁, 수계농원, 하와이까지 대산종사가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그저 거처라도 한번 보고 오는 것이 큰 복이고 낙이었다.

신심, 공심, 공부심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지금의 최 교도가 되기까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원기79년 2월15일 대산종사의 가르침을 받은 황직평 원로교무가 강동교당에서 재가교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전마음공부 훈련에 참가한 그는 "이 공부가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다.

"이미 10년 넘게 좌선을 하고 여러가지 방법을 찾았으나 바른 수행길을 몰랐어요. 그때의 훈련을 통해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고 정전공부의 개념도 깨달았지요. 법공부의 재미가 저절로 일어났어요."

특히 하와이 국제훈련원에서 반나절 대산종사의 시자로 시봉을 올리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정전마음공부를 했던 일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와이에서 장산님이 아버지와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는 외국인 부부를 마음대조 공부로 풀어주신 일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옆에서 통역을 했지요. 그런데 대산종사님은 시간시간으로 저를 부르시어 '야! 그 사람 어떠냐?'라고 계속 물으시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상황들을 일일이 말씀드렸고 나중에는 '그 사람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자기 아버지 미워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렸더니 '앗따! 그 사람 대단하다'고 하시면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정전마음공부를 하고 그 공부에 진전이 있음을 기뻐하셨다는 그날의 대산종사를 추억하며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는 향타원님(박은국 원로교무)과 예타원님(전이창 원로교무)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장산님께 '이 정전마음공부법은 말이 별로 필요없는 공부법이다. 말을 몰라도 코 큰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앞으로 이 법으로 가르쳐라'고 하명하셨어요."

이렇듯 한창 공부와 사업에 혈성을 다했던 그가 원기83년 7월, 믿고 함께했던 동업자의 과욕으로 덜컥 사업에 크게 실패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앞뒤 가리지 않고 그때도 수계농원으로 대산종사님을 찾아갔어요. 대산종사님은 '큰 실패는 큰 회상을 만나면 대 성공의 원인이 된다. 끝까지 법신불 사은께 매달려라'라는 말씀을 해 주셨지요. 그것도 조실에서 자동차까지 가시는 동안 세 차례나 멈추시며 거듭거듭 일러주셨어요. 그리고 '좋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때일수록 더 자주 나를 찾아와야 한다'고 용기도 북돋아 주셨지요."

일주일이 지나 또 대산종사를 찾았다. 대산종사는 그를 수계에서 왕궁으로 가는 차에 함께 태우고는 오는 길에 연꽃밭을 지나는 길에 '니중연화(泥中蓮花)' 법문을 내렸다.

"진흙에 파묻혀서 남모르게 공덕을 쌓는 것이 더 크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리고 7월말부터 환우가 깊어 접견을 않으셨지요. 그래도 조실문이라도 보고 와야 마음에 위안을 받을 것 같아 무작정 달려갔지요."

그런데 대산종사는 최 교도 부부를 침실로 불렀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최 교도는 이날의 기억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했다.

"'두 사람 다 얼굴이 좋아졌어! 얼굴이 좋아!' 대산종사를 마지막으로 뵙고 받든 법문이예요. 눈부시게 환한 성안으로 웃어 주시고 우리 두 사람의 손을 한참이나 잡아 주셨지요. 우리가 서울로 올라온 뒤, 몇 시간 후부터 병세가 급작스럽게 악화되어 원광대 병원으로 옮기셨다고 해요. 그리고 9월15일 총부로 환가하시어 17일 열반에 드셨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대산종사를 뵙고 받들었던 숱한 법문들, 특히 그는 마지막 받든 말씀을 '아내와 함께 간절히 서원하는 대공장 사업이 반드시 교화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알고 '주와 객을 전도하지 않도록 일러주신 것'이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다.

"이렇게 간절한 부촉을 받은 제가 조동(早動), 경동(輕動), 망동(妄動)으로 실패의 늪을 아직도 헤매고 있으니 그 죄를 생각하면 가슴이 졸아듭니다. 어느 생엔가는 성공하도록 끊임없이 바보의 행진을 하고 또 하려구요."

그는 진리를 향해 돌아가고 돌아가는 공부가 바보의 행진이라 말하며 언제까지나 우리를 보살펴주리라 생각하고 어정어정 지나온 어리석음이 더 가슴 아프다고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스승님께 서원 올린 공부와 사업을 언제가 되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영원한 서원이라고 했다.

"지금 그 색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법신의 훈증만이 영원히 남아 있지요. 평소 '국을 트고 마음공부 잘하라'는 구도자로서 성취를 끊임없이 촉구했던 인류의 스승 대산종사님이셨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신념이 없는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 하며, 시작도 해 보지 않고 망설이는 것은 그 자체가 정신을 소모하는 일임을 일찍이 가르쳐 주셨지요."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운 환경이 닥쳐도 전생의 업이라고 믿고 감수불보하고 보은 하려고 노력한다는 그는 이것이 제생의세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공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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