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대종사께서 방언공사를 마치시고 원기 4년 김제 금산사에 잠시 머무신 적이 있으신데 그 때 거쳐하시던 출입구 위 벽에 '○'을 그려 붙이셨다고 한다. 원기 20년에는 총부 대각전 준공 기념식에서 단상 벽상에 조그만 목판 일원상을 정식으로 봉안해 보이셨고 그 뒤로 일원상 봉안이 점차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일원상이 우리 인간과는 어떤 관계인가를 당시 대학생이셨던 숭산종사께서 여쭈었고(3장) 그에 대한 답변의 말씀이 이 6장에 까지 이른 것이다. 원기 23년 회보 46호에 실린 법문이니 그 무렵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을 신앙의 대상으로 드러내심은 종교사에 없는 일대 혁신이다. 당연히 대중의 이해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이런 질문도 하셨으리라.

"그렇다면 도형으로 그린 저 일원상 자체에 그처럼 무궁한 진리가 갊아 있으며(3장) 복락을 내릴 위력이 있으며(4장) 큰 인격을 이룰 공부법(5장)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저 도형의 일원상은 참 일원이 아니라고 하셨다. 참 일원을 알려주기 위한 한 표본일 뿐이라고 밝히시니 일체의 (우)상을 철저하게 배제하심이다.

도형으로 그린 일원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을 뿐인데, 철없는 어린 아이는 저 하늘의 참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본다. 손가락을 달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면 저 일원상을 통하여 참 일원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발견하였으면 그것을 잘 지켜야 할 것이며 나아가 실지 생활에서 그대로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일원을 우리의 내면으로 비추면 곧 성품이라(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 참 일원을 발견함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의 참된 성품을 지킴은 양성(養性)이요, 일원의 원만한 마음을 실행함은 솔성(率性)이다.

결국 삼학 공부를 실천하여 삼대력을 갖추어야 일원상의 진리와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합일하게 된다.

어느 날 대산종사께서 제자에게 물으셨다. "일 년에 보름달이 몇 번 뜨냐?" 12번 혹은 13번이라고 답하여 올리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한다. 달은 항상 보름달이다. 다만 상황(경계)따라 이지러져 보이기도 하고 차보이기도 할뿐이다.

대종사께서 형상으로 그려 보여주신 저 일원상을 통하여 내 안의 여여한 그 자리를 발견하자. 그리고 온전히 기르고 온전히 활용하자.
<성지송학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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