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관 교도 /
    해운대교당(논설위원)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를 대체로 '법신불 일원상을 닮아가기 위하여 믿고 표준삼아'라고 해설하는데 대하여, 교전에 근거하여 견해를 정리해 본다.

'일원상서원문'의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를 요약하면, '일원상을 체받아서 삼학수행을 한다'는 내용이다.

'일원상의 수행'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하자는 것…'을 요약하면,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 삼학수행을 한다'는 내용이다.

위의 두 내용을 대조해보면 '일원상을 체받아서'를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표본으로 삼으려면 일원상의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인데, 일원상의 진리는 사량으로 이해하는 자리가 아니고 관조로서 깨쳐 얻는 자리 혹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자리라고 하였으므로, 결론적으로 '성품을 보는 것이 일원상을 체받는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 삼학을 수행한다'를 '성품을 보아서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 동시에 성품의 세가지 속성을 표본으로 삼아서 삼학을 수행한다'로 정리할 수 있다.

견성에 대한 말씀으로 <대종경> 성리품8장 '견성이라 하는 것은 비하건대 거부 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재산으로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고'에서 보듯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늘 마음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의 본래모습(성품)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정법의 인연으로 비로소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자리'가 성품임을 체험으로 알게 되면 견성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외록> 일심적공장의 '…성품을 보는 것은 마치 글씨 배우려는 사람이 선생을 만나 좋은 글씨체를 받아 온 것과 같고, 수 배우려는 사람이 좋은 수본을 얻어온 것과 같은 것이다. …실은 견성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기가 본 그 성품과 같이… 앞으로 인지가 많이 발달되면 십 여세만 넘으면 대개 초견성은 할 것이요, 성불을 위하여 큰 공력을 들이게 될 것이다'를 요약하면, '성품을 보아서 성품의 표본대로 삼학수행에 공을 들인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는 '성품을 보아서 성품의 표본대로' 혹은 '초견성을 하여서'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적이라고 본다.

성품을 보면 곧 진리에 대한 신앙이 쉽게 세워지지만 좀 더 쉽게 신앙하도록 밝혀주신 <대종경> 교의품4장 일원상의 신앙에 대한 말씀을 정리해 보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를 '처처불상의 사은신앙을 하는 동시에 사사불공의 보은수행을 표본으로 삼아서'라고 볼 수 있다. 처처불상이 제대로 믿어진다는 것은 곧 초견성을 한 것이므로, 이 또한 '성품을 보아서 삼학수행을 한다'는 내용이 된다.

또한 삼학병진의 수행과목을 순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원상의 수행'에서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한다'로서 견성을 앞에 두었고, '일원상서원문'에서는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한다'로서 양성을 앞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앞의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를 견성으로 본다면 결국 견성을 앞에 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근기의 문제이긴 하지만, 성품을 먼저 보지 못한 채로 수행을 하는 것은 오염수라는 <수심결>의 내용과 같은 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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