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로 나타나는 마음표현

과거는 보석·귀금속이 장신구 소재
현재는 일상생활속 창조적 예술표현

 

▲ 국보 138 금관 및 부속금구.

 

우리 민족은 미를 알고 문화를 지닌 훌륭한 민족이었다. 또한 개성이 뚜렷한 우리 민족 고유의 의식주 유형의 문화가 자랑할 만큼 많다. 우리 민족은 몸을 단장하는데 필요한 장식물 즉, 장신구에 있어서도 어느 민족의 것보다 우수한 것들이 많이 있다.

장신구는 우리 민족의 외부로 나타나는 마음의 표현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장신구는 우리 몸 일부에 직접 쓰거나 걸거나 또는 끼는 장식품과 의복의 장식을 위해 붙이거나 매거나 늘어뜨리는 소품을 지칭한다. 그 외 모든 장식 목적에 필요한 소지품 등의 치장에 사용되는 소품, 혹은 신체화의 조화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가지 소도구를 지칭한다.

그 종류에는 허리띠, 팔찌, 반지, 귀고리, 목걸이, 노리개, 머리장식품 등이 있으며 장신구의 기능은 인간의 원초적인 미적의식을 나타내주는 장식적 기능과 관련된 장신구를 착용하게 되었다. 선사시대의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장신구의 시초는 그 시대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개껍질이나 조약돌, 짐승의 이빨이나 뼈 등을 소재로 신체의 일부를 장식하거나 주술적인 부적의 용도로 쓰여 왔다. 또한 장신구는 공동생활에서의 종속표시이거나 지배자들의 권력상징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인간의 원초적인 미적의식과 함께 주술적인 측면 그리고 지배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사회적 측면 등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 국보 156호, 백제시대 금 귀고리.

이렇게 시작된 장신구는 세계 각 민족의 풍속이나 그곳의 자연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 재료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왔다. 한국의 장신구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주고 악운을 몰아내는 용도로 쓰였다.

장신구는 또한 사용자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기도 했다. 동물의 뼈들로 만들어진 관모양의 비취와 목걸이들이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금, 은, 그리고 금빛의 청동으로 절묘하게 만들어진 삼국시대의 장신구들도 발견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장신구들에는 머리장식 그리고 목걸이, 귀걸이, 가슴조각, 팔찌, 모자, 반지 등이 있다.

우리나라 장신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장신구가 바뀌어 지고 그 시대의 특질이 잘 나타났다. 원시시대는 석기시대, 토기시대, 금속문화 시대를 통틀어서 말한다. 여기에서 금속문화를 받아들이면서부터 그 기법이 현저하게 발달된 것들로는 청동제(靑銅製)의 무기(武器), 의기(儀器) 장신구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제작된 금속 장신구류들은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것이 많으며 장신구 제작과 착용에 있어서 체계적인 계통이 서게 되었고 신분제와 결부시켜 규제를 하여 발달과정에 있어서 가치성이 큰 공예품들이 속출하였다. 기본 재료인 금속류로는 금, 은, 동 등이 있고 옥석류로는 자마노, 비취, 수정, 유리, 홍옥 등이 있으며, 보패류로는 호박, 산호, 진주 등이 있다.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가운데 투각 초화문, 금동관과 투각 용봉문, 금동관형장식과 금동 귀고리 등이 있다. 상당한 세공으로 우리나라 장신구사에 있어서 놀랄 만큼 장신구의 시원 양식을 나타내었다.

▲ 국보 160호, 무녕왕릉 왕비 은제 팔찌.

백제에 있어서는 고구려보다 한층 발달한 다양한 장신구의 발견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옥을 주술적, 종교적 목적으로 또는 의식용 장신구로 패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지배층의 필수적인 장신구였다. 신라시대에 있어서 우리나라 장신구 발달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고분을 중심으로 발견된 장신구는 거의 순금제품이며 기교성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고려시대의 장신구 발달에 있어서는 금제가 많았고 따라서 조복(朝服),상복(常服),공복(公服),편복(便服),제복(祭服)에 따라 장신구 착용이 각각 달랐다.

조선시대의 장신구는 역시 복장의 구조에 따라 달랐다. 관류에 있어서는 그 종류와 형태가 너무 많아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따라서 거기에 부착되는 장신용구도 많아지고 유교정책으로 인해 한층 규제되어 장신구를 만드는 장(匠)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금, 은의 사용을 막았던 정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그러나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으며 각종 비녀와 여러 가지 형태의 뒤꽂이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첩지와 떨잠, 그리고 머리를 위한 댕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중기부터 거의 자취를 감춘 귀걸이와 가락지가 있다. 이밖에도 패물의 하나인 노리개, 향갑, 향낭, 침낭, 장도 등과 각종 주머니가 있었고 원삼이나 여름철 적삼 등에 단 단추도 그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장신구 수공작업을 하고 있는 박종임 작가.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하였던 장신구는 점점 그 필요성이 줄게 되어 차츰 의복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장신구의 역사는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하여 많은 변화와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제도가 변천됨에 따라 장신구가 바뀌어 지고 그 시대의 특질이 잘 나타났다.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보석, 귀금속 등의 희소가치가 있는 소재를 사용하여 그 시대의 최고의 세공, 가공기술로 만들어진 것을 장신구라고 일컬어 왔으며, 재산, 기념, 영구성, 역사성 등의 성격을 갖는 장신구로부터 다양한 양상이 존재해 왔다. 또한 현대장신구는 자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예술성을 띤 독자적인 세계를 갖게 되며, 장신구 재료는 더 이상 귀금속이나 보석류에 의존하지 않는다.

창조적인 장신구를 위한 재료 선택의 폭은 확대 되어가고 있으며 개성적, 예술적 표현으로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물건들도 훌륭한 장신구 소재가 될 수 있다.

교육과정에서 볼 때 장신구는 특히 금속공예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여 왔다.

예술교육이란 상상력을 개발하는 교육이다. 따라서 상상력의 형성, 이미지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발달된 과학기술에 의해 드러나는 많은 요소들은 장신구 표현에 있어서도 중요한 매체로서 등장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 발달에 따른 매체의 개발은 장신구 표현 영역을 넓게 확대 시켜 나갈 것이다.

▲ 박종임 / 금속공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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