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와 삶의 여유가 머무는 곳

모정은 우리 민족의 정성, 자연환경과 혼연일체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 소통과 휴식의 공간

 

 

장맛비 내리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초록 애벌레 한 마리와 같이 길을 걷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과 같이 가슴속으로 들어간 길이 출렁거린다. 이럴 때는 여행을 가고 싶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러 가는 것이다. 아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으러 가는 길이다. 나를 찾으러 갈 때는 혼자가 좋다. 바다라면 좋겠다. 아니 산이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 조상들의 풍류와 삶의 여유가 머무는 곳 모정(茅亭)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모정(茅亭)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자(亭子), 누(樓), 대(臺)를 총칭하는 말이다. 모정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자연환경에 부합되는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이자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는 소통과 휴식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안의 정원을 만드는 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이라 집에서 조금 벗어나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산야(山野)와 계곡이 널려있어 인근에 모정 하나만 지어놓으면 십리 밖 세상은 다 자기 것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집 안에 정원을 꾸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다실(茶室)문화가 발달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민족성, 역사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은 예로부터 왕이나 한 사람의 지도자가 아닌 다수의 성주(城主)가 다스리는 나라로 성주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전한 곳이나 연못 한 가운데 집을 짓고 그 곳에 다실을 만들었다. 정적의 습격을 대비하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모정의 유래는 언제부터 인지 정확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형태상 특징으로는 고구려의 부경이라는 소창과 지금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두막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대(古代)부터 이미 지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상으로는 모정의 하나인 정자는 <삼국사기> 27권 백제본기 중 의자왕조의 '의자왕 15년(655년)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국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정자보다 규모나 법식(法式)에 있어 조금 상급에 속한다는 누(樓)는 이보다 앞선 '무왕 37년(636년) 망해루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모정은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생활철학이 정신적 바탕을 이룬 민족성에 가장 부합하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강조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특히 선종이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면서 자연과의 동화가 생활화 되어 더욱 친숙해 질 수 있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우물터가 아낙들의 소통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모정은 남성들의 풍류, 소통, 휴식을 위한 터전이었다. 물론 일부는 추모나 기념, 강학(講學)의 목적으로 건립되기도 했고, 궁궐, 사찰, 향교, 서원, 일반 주택의 부속된 시설로 건립되기도 했다.

모정은 정(亭), 루(樓), 대(臺)로 구분되는데 반드시 모두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건축기법이나 용도에 따라 형태가 다소 상이하였다.

누(樓)는 정자와 같은 형태이나 다락을 하나 더 올려 2층으로 만든 형태를 말하는데 이는 평면적인 경치를 즐기는 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서였고, 대(臺)는 높은 절벽이나 해안선에 세워 먼 곳을 조망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반면에 일반적인 형식의 정자는 자연 그대로 또는 주위 환경 그대로 보이는 시야나 각도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형태나 형식을 불문하고 이러한 건물들은 모두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즉 지붕과 기둥만 있고 문이나 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풍류를 즐기는 우리 민족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반해 앞서 말한 일본의 다실(茶室)문화는 우리의 모정문화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폐쇄성에 있다. 이러한 일본의 외부와 단절된 다실(茶室)문화는 훗날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큰 원인이 된다. 그래서 혹자들은 임진왜란을 차사발 전쟁 혹인 도자기전쟁 이라고도 한다.

모정의 지붕 형태는 팔각형이 대분이고 평면에 따라 4모, 6모 드물게는 7모 지붕이 있으며, 맞배, 우진각, 팔작, 아자형, 겹지붕 형태가 있으며, 지붕의 재료는 기와나 볏짚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면서 함석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

내 고향인 화순에도 영벽정과 송석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아름다운 산과 강 사이에 지어진 그곳의 풍경은 내 시심(詩心)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유년의 시절 시간만 나면 그 곳에 앉아 먼 날의 꿈을 키우고 시인으로서의 토대를 다진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내 졸시 중 모정에 관한 시'영벽정 앉아'를 음미하면서 오늘 모정에 대한 짧은 여행을 마치기로 한다.

바람 자고 물결 일지 않으니/ 강물도 흐리지 않네/ 잿빛 노을에/ 천길 물속으로 떨어지는 낙조/ 못다 한 전설은/ 다시 시작되지 않고/ 햇살 잠든 물새 언덕에/ 사공의 한숨 소리/ 빈 배만 속절없이 흔들리고/ 꿈속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래/ 빈 가슴 넘치는 푸른 추억/ 잔잔한 물결 되어 일면/ "여보게 사공/ 시방 끽끽 노를 저어/ 어서 강을 건너세/ 바람꽃 피어오르면 어쩔란가"/ 노을에 취한은 갈대가 속삭인다//

▲ 김정호 교도
구포교당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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