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이 장독대에 쏟아진다. 너무 투명해서 가슴까지 청명해진다. 짙은 커피색의 낙엽이 바람에 쫓겨 마당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제철도 모르고 피어있는 동네 오솔길의 코스모스가 벌써 시들어가고 있다. 봉숭아꽃이 사라진 돌담 화단에는 키 큰 해바라기가 구부정하게 서있다. 나는 슬프고 우울한데, 해바라기는 태양의 모습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저 혼자 환하게 웃고 있다.

다음은 신경숙의 소설 <그는 언제 오는가?>에 나오는 내용이다.
왜 하늘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걸까? 스물아홉에 암으로 죽어야하는 동생이 언니에게 물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릴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생각하느냐고?"

언니가 대답했다.

"그래, 하늘은 들판을 사랑했으리. 먼 데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낡은 신발을 신고 자루를 메고 들로 찾아들어 이삭까지 다 주워가고 나면 인적이 끊긴 들판은 저 홀로 외로웠으니. 볏단 위로 찬 서리가 내리고 기러기가 몇 차례 지나가고 기차의 기적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고 내달린 뒤로도 오래오래 들판은 저 홀로 외롭고 높고 쓸쓸했으니."

큰 눈에 웃음이 맑은 배우 장진영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은 그녀를 귀해 하고 사랑했으니, 그녀는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영화 '국화꽃 향기'의 희재 처럼 떠났다. 위암에 걸린 희재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치료도 받지 않고 힘들어 한다. 결국 그녀는 남자에게 아이를 선물하고 저 세상으로 떠난다. '국화꽃 향기'의 희재를 연기했던 장진영이 우리 곁을 떠났다. 왜 하필이면 그녀인가? 그녀는 자신의 임종을 지킨 남자에게 영화 속의 대사처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여자도 아마 살고 싶었을 거야, 방법이 있다면 살고 싶었을 거야." 그래도 그녀는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가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하늘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 뒤의 풍경이 계절이 바뀌면서 점점 변하고 있다.

10월에 추수가 끝나면 수천 평의 논은, 무리지어 비행하던 참새마저 떠나버릴 것이고, 금방 들판처럼 황량해질 것이고, 저 혼자 버려져 저 혼자 외로울 것이다. 창문을 열면 피할 수 없는 그 풍경, 그 들판을 바라보며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봄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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