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배출과 구들 온기 유지기능

 

▲ 변산 원광선원 굴뚝.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난방법은 온돌 난방에서 공기 난방으로 현대화되기 시작하면서 전통 굴뚝 양식은 점점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국의 전통 굴뚝은 한민족 역사, 생활 등과 유기적 관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한옥의 형태가 양옥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전통 난방인 온돌구조가 하나씩 없어지는 것과 궤를 함께하며 정겨웠던 굴뚝의 생명도 다하게 된다.

최근에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하고 변형된 굴뚝의 형태들이 등장해 다시 전통 굴뚝의 해석을 새롭게 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굴뚝

신석기 시대의 움집터를 보면 중앙에 약 20㎝깊이 지름 50cm의 주위에 냇돌을 둥글게 둘러놓고, 불이 번져나가지 않도록 다른 돌이나 진흙을 낮게 쌓아놓은 부엌을 볼 수 있다.

또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는 집의 평면이 네모 내지 긴 네모로 바뀌면서 부엌의 위치가 벽쪽으로 옮겨졌고, 이 무렵의 부엌 기능은 난방을 위한 화덕과 조리를 위한 부뚜막의 기능으로 바뀌었다. 부뚜막의 연기가 벽에 쌓아 올린 진흙 굴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그림에 의한 굴뚝은 4세기 중엽 고구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추측된다. 고구려 고국원왕(331~371)의 무덤에 있는 벽화를 보면 부엌은 맛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독채 형태이고, 세명의 아낙이 음식을 준비하는 듯 한 그림을 보면 아궁이와 나란히 위치해서 벽 밖으로 빠져 나온 오리 주둥이 꼴의 굴뚝을 볼 수 있다.

칠불사 아자방 온돌과 굴뚝

굴뚝과 온돌문화가 창조되었던 고구려가 4세기 중엽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에 자연스럽게 난방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시대의 화덕과 굴뚝 문화는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기능으로 역할만을 했을 뿐 근대 난방과 조리를 혼합한 용도가 아니었다. 음식조리와 온돌, 굴뚝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시기는 7세기 중엽이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유는 경남 하동의 신라시대 절인 칠불사에 아자방(亞字房)이라는 온돌 구조의 방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신분에 따른 다양한 형태와 재료의 굴뚝이 나타나게 되는데 상류계층의 굴뚝은 반반전, 기와, 벽돌을 주로 사용하였고, 서민층은 옹기, 통나무, 흙과 돌을 이용한 사례가 많다.

아궁이 장작불→방고래→부넘기→고래→개자리→굴뚝 배출

굴뚝은 온돌 문화와의 밀접한 관계가 있어 따로 떼어놓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식 조리를 하기 위한 화덕과 난방을 목적으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 불의 열과 연기가 고래(이동통로)를 걸쳐 굴뚝으로 나가는 동안 구들은 따뜻해진다.

그 중 아궁이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방고래로 들어가면서 급경사를 이루어 높아지다가 다시 약간 낮아지는 부넘기가 있다.

부넘기는 불길을 잘 넘어가게 하면서 불을 거꾸로 내뱉지 않도록 되어 있다. 불길이 고래에서 굴뚝으로 연결되기 전에 고래보다 깊이 파인 골이나 웅덩이가 있어 재나 연기를 머무르게 하는 개자리가 위치한다. 온돌은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난방방식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 맞게 설계되었다.

굴뚝은 온돌의 구조 중 하나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그 열기로 인해 음식이 조리되며 장작불의 열과 연기는 경사진 부넘기를 넘어 개자리에 머물다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는 거리가 멀수록 구들은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기후와 지리적 특성따라 구분

굴뚝의 모양은 대체로 설치 위치와 형태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간이형(簡易形)의 굴뚝은 본격적인 굴뚝의 전 단계로 처마 밑에 간단한 구멍을 뚫거나 툇마루 밑에 구멍을 내어 배기(排氣)하는 형태로 주로 남부지방에 분포한다.

독립형(獨立形)의 굴뚝은 궁궐, 상류 주택, 사찰, 일반 농가에서 널리 건축된 형태로 육각형, 장방형, 방형의 모양을 하고 있고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복합형(複合形)의 굴뚝은 두 가지의 형태를 합친 것인데 담과 굴뚝의 결합이나 집과 굴뚝의 결합을 말한다.

굴뚝의 형태는 기후적인 영향과 지리적인 특성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반도 북부지방이나 산간지방은 높은 온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굴뚝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집과 굴뚝과의 거리가 멀다.

이는 북서풍의 영향으로 연기가 방안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남쪽지방이나 평야지역의 굴뚝은 대체로 낮고 집과 붙어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간결하다.

전돌굴뚝은 전돌을 만들때 점토를 건조시키거나 구워낼 때 심하게 수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화(耐火) 점토를 30% 섞어서 반죽한다. 불에 구으면 점토의 대부분은 20%의 수축율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감안해 내화점토를 섞는 것이다.

전돌을 사용한 경복궁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이나 자경전 뒤뜰 십장생 굴뚝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오지굴뚝은 흙으로 빚어 만든 토관을 사용해 지붕높이 만큼 쌓아 올린 다음 바람이 불어도 기울어지지 않도록 긴 작대기를 몇개 주위에 세우고 새끼나 철사 따위로 묶는다. 굴뚝 아가리에 좌우 양쪽에 연기 구멍을 낸 투구 모양 덮개를 씌우기도 한다.

함경도 지방 '구새' '널구새'
함경도 지방에서는 굴뚝을 '구새'라 부른다. 구새는 본디 속이 저절로 썩어서 구멍이 뚫린 나무를 이르는 말이지만 굴뚝으로 쓰이는 까닭에 그렇게 부른다. 통구새감은 50년 이상 자란 피나무를 이용하며 뿌리 쪽부터 안이 썩기 시작할 때 벤 다음 다듬어 건조해 사용한다.

또 굴뚝을 널로 만드는데 직사각형의 형태로 이것을 '널구새'라고 이름 부친다.

서민들에게 가장 많이 애용되는 굴뚝의 재료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흙, 냇돌, 기와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산사의 굴뚝은 깨진 암키와 흙을 한켜씩 번갈아 가며 쌓아 올린 다음 사방에 연기 구멍을 내고 그 위에 지붕모양의 덮개를 설치해 멋을 더한다.

경복궁 십장생 굴뚝과 아미산 굴뚝

▲ 경복궁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
경복궁의 십장생 무늬 굴뚝(보물810호)과 아미산 육각형 굴뚝(보물811호)은 최고의 작품이다. 굴뚝이 국가의 보물로 지정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뿐더러 그 아름다움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십장생 굴뚝은 원판보다 한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원단에 덧붙여 축조하였다. 제일 아래 부분에는 좌우에 해태를 배치하고 그 위로 직사각형 공간(벽면)에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 십장생 문양과 연꽃, 국화, 난초, 포도, 대나무, 토끼 등을 조각으로 배열한 후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해 독특함을 더 했다. 한편의 민화를 보는 듯 자연 환경과 잘 어우러져 작품성이 뛰어나다.

경회루 연못을 파낸 흙으로 쌓았다는 계단식 아미산 후원은 교태전 뒷동산을 말한다. 아미산은 도교에서 신선들이 사는 산을 의미한다. 아미산 후원 굴뚝은 화강암으로 네 계단을 만들어 배치한 다음 붉은 색 벽돌로 장식해 네 개의 굴뚝을 만들었다.

육각형으로 된 이 굴뚝이 각 면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모란 등 성서로운 화초들이 새겨진 전이 끼워져 있다. 인공적인 축조물에 화초나 과실나무를 심어 굴뚝의 경직성과 단조로움을 상쇄시켰고 계절의 변화와 감성적 자유를 주는 느낌을 한껏 연출했다.

아미산 굴뚝은 직선적인 기하학의 공간인데도 한껏 자연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는 한국 정원의 특징을 잘 드러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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