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그 일에 일심하라

'좌선(坐禪)이라 함은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 예로부터의 통례이니(단전주의 필요),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좌선의 요지), 선(禪)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 바(무시선법)···.'

단전주가 잘 되어야 좌선을 잘 할 수 있고 좌선이 잘 되어야 무시선을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시선의 원리는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천만 경계를 당하여 동(動)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靜)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는 것이다.

무시선 공부의 단계는, 아무리 욕심나는 경계를 대할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정신을 놓지 않고 단전주를 통하여 마음의 고삐를 잡고 있는 것이 집심 공부 단계이다.

집심 공부로 어느 정도 마음이 조숙되어 힘이 쌓이면 경계를 대할 때마다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을 잡는 공부가 관심 공부 단계이다.

관심 공부 단계를 지나 평소 심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계에 놓아 맡겨 보되 챙기지 않아도 여전히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길이 잘든 무심 공부 단계라 할 수 있다.

교리도에서는 무시선을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이라 하였는데 이는 동할 때나 정할 때나 항상 선의 심경을 떠나지 않고, 일이 있을 때나 일이 없을 때나 선(禪)하는 마음이 연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시선의 강령을 들어 말하자면 '육근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有事)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이다.

동정(動靜)간에 무슨 방법으로 진공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로 용(用)을 삼아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진공으로 체를 삼는다는 것은 단전주를 통하여 요란함이 없는 원래 마음을 만든다는 것으로 마치 저울의 눈금을 '영(○)'이 되도록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묘유로 용을 삼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이 없는 본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보아 마치 '영(○)'이 되어 있는 저울의 눈금으로 정확한 무게를 다는 것처럼 일과 이치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취사하자는 것이다.

그 일 그 일에 일심하라는 것은 일을 통하여 일심을 만들라는 말이 아니라 일심 상태 그대로 일을 하라는 말이다.
남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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