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지만 은은한 빛깔, 예술성 높아

▲ 놋쇠로 만든 이동식 작은 요강과 세수대야.
웰빙 열풍을 타고 일명 '놋그릇'이라 불리는 '유기'가 우리 곁에 다시 다가서고 있다.

유기는 식중독균인 O-157을 살균하는 신비한 그릇으로 알려져 웰빙그릇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사기그릇, 프라스틱 그릇에는 나타나지 않는 농약성분이 유기에서 탈색이되어 농약성분을 표시해 준다. 그래서 야채를 씻을 때 일부러 놋그릇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야채에 붙어있는 벌레들이 놋쇠가 뿜어내는 강한 작용 때문에 전부 씻겨 나갔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생활의 식문화에 큰 자리를 맡아온 유기. 경기도 안성지방 장인들은 조선시대의 양반들과 관가에 맞춤유기를 공급해 왔다고 전해진다. 그 장인들의 솜씨와 정성으로 인해 안성에서 만든 것이 제일이라는 뜻의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생활용품인 유기

놋쇠로 만든 제품을 통틀어 '유기제품'이라 하며 조선시대까지도 즐겨 쓰던 생활용품이었다.
놋쇠는 자연적으로 출토된 광물질이 아니고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 니켈 등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합금 물체를 말한다.

놋쇠를 옛날에는 유석, 유철, 진유, 유남이라고도 했다. 유기는 동과 주석, 아연 등의 혼합합금 물질이므로 용해하는 기술과 합금의 물질에 따라 색채와 질이 결정되었다. 이처럼 놋쇠는 세계적으로 특이한 금속으로 식기를 비롯하여 촛대, 향로, 소반, 대야, 악기, 불구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나 기구로 만들어 썼다. 특히 불가에서 스님들의 삭발도구인 삭도는 베어도 덧나지 않는 방짜제품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유기는 현대적인 과학방법으로 금속학적 측면에서 정립이 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경험으로 이루어진 결과에 의하여 합금 방법이 정립되었다.

안성유기 기능보유자 김수영(58·중요무형문화재 77호 향원 김근수 子) 씨는 "이곳 안성에서 제작하는 유기제품은 놋쇠를 두들겨서 만드는 방짜유기부터 장식품을 만드는 주물유기까지 수 십 가지가 넘는다"며 "장식품이나 화로처럼 고온에서 견뎌야 하는 유기는 주물기법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 김수영 안성유기 기능보유자. 70여년을 유기와 함께한 장인이다.
그의 말처럼 놋쇠의 종류에는 방짜와 주물, 반방짜로 크게 나누어진다. 방짜는 동에다 주석을 합금하여 어우러진 놋쇠를 말한다. 이 방짜 놋쇠는 인체에 이롭고 망치로 두둘겨 늘리고 다듬어 이루어지기에 일명 양반쇠라고도 한다.

이와달리 주물유기는 맨들 맨들하고 반지르하다. 불에 녹인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서 만들어낸다. 그래서 제품을 다량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방짜유기는 손과 기계의 합작품이다.

이동희 안성맞춤박물관 문화해설사는 "유기는 전통, 문화, 역사의 그릇이다"며 "종묘제례 때에는 꼭 유기그릇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안성마춤박물관에는 종묘제례 때 쓰던 '관세이'가 있다. 관세이는 성수를 담는 그릇이다. 유기의 문양이 아름다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관세이'는 중요무형문화재 77호 향원 김근수 기능보유자의 유작이기도 하다.

이 문화해설사는 "용무늬가 있는 것은 옛날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다. 용작으로 물을 떠서 대야에서 손을 씻었다. 유기에 물고기가 있는 것은 늘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며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유기는 김근수 인간문화재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고 말했다. 이 해설사는 안성유기의 특징에 대해 "원석의 우수성과 동과 주석의 정확한 혼합비율로 아담한 모양새가 빼어나고 광택이 나고, 수려한 외관과 견고한 내구성을 자랑한다"고 말 한 후 "섬세한 문양까지 곁들여져 유기그릇을 쓸 때면 늘 경건함과 따뜻한 정성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 해설사의 말대로 놋쇠의 성질은 단단하고 견고하며 보온성이 뛰어나다. 금속 중에서 색상이 금과 가장 가깝고 다른 금속과 달리 투박하고 은은한 광택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그래서 예로부터 귀하게 쓰던 그릇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유기를 보고 '금그릇'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주는 하얀 사기그릇이나 도자기 그릇을 사용하고 겨울에는 보온성이 뛰어난 놋그릇을 주로 사용했다.

인기를 회복하는 유기

유기를 더 반짝거리게 하려면 명절 때 마다 기왓장을 구워 잘게 빻아서 채에 쳐서 유기를 닦았다. 기왓장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연탄재 가장자리를 잘게 부셔서 닦기도 했고, 시골에서는 짚을 태워 그 재와 함께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모래를 약간 섞어서 닦기도 했다. 자연적인 것들이 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날은 온 가족이 동원되는 큰 행사이기도 했다. 잘 닦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연탄이 들어오면서 공해에 약한 유기는 자주 색이 변해 일반 가정에서도 잘 안쓰게 되었다. 그 자리를 사기그릇이나 프라스틱이 대신했다.
하지만 요즘 웰빙의식과 유기 보관이 쉬워지면서 혼수용품으로 다시 인기를 회복해 가고 있다.

안성맞춤박물관에 있는 모든 유기제품에는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활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던 유기대야, 자물쇠, 침, 안경, 비녀, 수염 빗, 약탕관, 찬합, 신선로, 찜그릇, 반상기, 밥통, 촛대, 무령, 타악기, 인두, 놋수저 등 정겨움이 고스란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정교한 문양의 '관세이'종묘제례 때 사용한다.
그 중 '청동침'은 자체 살균력을 가지고 있어 재사용을 해도 병균을 옮기지 않는 장점이 있다. 또 청동면도날 역시 수염을 정리할 때 자주 썼다. 간혹 수염을 정리하다 잘 못하여 상처가 나도 덧나지 않았다. 이 역시 자체 살균력 때문이다.

옛 여성들에게 추억이 될 유기도 있다. 이 문화해설사는 "청동요강"이라며 "시집가던 신부가 몇 날 몇 칠 시댁에 가야했던 시절에는 가마 속에 아주 작은 요강을 친정어머니가 넣어 주는데, 그 가마 요강 속에는 솜이나 재를 한 줌 넣어서 가마 속에서 일을 봐도 가마 밖에서는 그 어떤 눈치도 알아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과거 어머니들의 지혜로운 면이 돋보인다.

역사적인 보물이나 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유기나 도자기에 보관된 작품들이 많다. 유기는 그만큼 변함없이 견고한 그릇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우리사회가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 되면서 다시 유기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유기 속에 담겨진 변함없는 장인의 뚝심이 엿보인다.

오늘도 안성유기의 생명줄을 홀로 버티고 있는 김수영 기능보유자의 순박함에 전통 유기는 서서히 활기를 되찾고 있어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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