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0 : 그렇다면 권선징악 면에서 기독교와 원불교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 : 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칼을 가지고 놉니다. 칼을 가지고 놀면 위험한데 이를 막기 위해서 기독교에서는 "얘야, 너 칼을 가지고 놀면 애비한테 혼난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이에게 겁을 주어서 칼을 가지고 노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어린이에게 "칼을 가지고 놀다 보면 잘못해서 손을 다칠 수 있다"라고 인과보응의 원리를 설명하여 칼 장난을 못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같이 속효성이 없고 어린이를 설득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가슴과 가슴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면 원불교는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머리와 머리로 접근하는 고등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인 아인슈타인은 인간 종교의 세 가지 차원을 가장 낮은 수준의 종교를 공포에 바탕을 둔 종교, 다음 수준의 종교를 도덕에서 싹튼 도덕종교라고 말하고 최고수준의 종교를 우주 종교적 체험, 과학적 종교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불교는 도덕적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우주 과학적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무겁겠습니까?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겁습니다. 예를 들어 솥뚜껑이 뜨겁다는 것을 알고 잡으면 살짝 잡거나 수건으로 싸서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명(모름 또는 무지)이 모든 죄업의 근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근본 원리를 알고 하는 일과 모르고 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기의 퓨즈가 나가서 컴프렛사가 섰습니다. 왜 퓨즈가 나갔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퓨즈만 바꿔 끼워서 다시 컴프렛사를 돌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퓨즈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업의 원리를 모르고 죄업만을 안 짓는다고 결심해야 곧 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비관리에서는 5 WHYS라고 하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그것은 적어도 5번의 왜를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왜 퓨즈가 나갔는가? 과부하가 걸렸다면 왜 과부하가 걸렸는가? 실린더에 윤활유가 돌지 않아서라면, 왜 윤활유가 돌지 않았는가? 왜 윤활유 펌프는 정지했는가? 윤활유 펌프의 카플 링에 이물질이 들어갔다면 왜 이물질이 들어가는가? 왜 이물질의 커버가 벗겨지는가?"

여기서 원천적 잘못인 커버의 고리가 약하기 때문이라면, 컴프렛사가 섰을 경우 퓨즈를 바꿔 주는 것보다는 커버의 고리를 바꿔 주는 것이 원류관리라고 합니다. 반대의 경우는 퓨즈만을 바꾸는 것을 대증요법이라고 하는데 기독교는 대증 요법을 써서 당장은 효과가 나지만 우리 원불교는 원류관리를 통해서 원천적인 치유법을 쓰는 것입니다.

한양대·중곡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