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고(何以故)오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은 개불가취(皆不可取)며 불가설(不可說)이며 비법(非法)이며 비비법(非非法)이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일체현성(一切賢聖)이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으로 이유차별(而有差別)이니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모든 법은 그 법을 통하여 공부를 하여 나갈지라도 끝내 간직할 필요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자리를 취했으며 말이나 글을 통해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그 실상과는 멀어지기 때문에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자리라 하셨다.

또한 그 현묘한 경지를 법으로 나타내도 어긋나고 비법으로 나타내도 어긋나는 자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체 모든 현상들이 이와 같이 미풍 하나라도 움직이면 부서지는 자리를 바탕하여 일체 차별법을 마련했기 때문에 그 일체법이 일체경에도 적중하지도 아니함이 없고 따라서 부족함도 남김도 없는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법은 법에 고집하여 법에 묶여서 본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부처를 이룰 수 없다. 입으로만 외우고 몸과 마음으로 실행이 없으면 법이 아니고 입으로 외우고 몸과 마음으로 실행하여 마침내 얻은 바도 없음이 비비법 즉 법마저도 놓아버린 경지가 되는 것이다.

부처께서 무유정법이란 마음에 얻는 것이 없으며 또한 얻지 못함을 말할 것도 아니건마는 다만 중생들의 소견이 같지 아니하므로 일체 여래께서는 중생들의 근기에 응하여 가지가지 방편으로 인도하여 교화하고 제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고집과 애착을 여의게 하심이라고 하셨다.

중생들의 근기와 성품에 따라 깨닫는 바가 서로 다르므로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께서 말씀하신 무위법 즉 함이 없는 그 법은 곧 머무름이 없는 자리이다.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상이 없다는 것이고 상이 없다는 것은 고요한 자리를 이름이니 그 자리에 다다르면 텅 비고 고요하여 밝은 지혜를 갖추어 참으로 깨달아 부처님의 성품과 다름이 없는 자리가 되니 이것이 곧 부처의 깨달음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을 보이신 것 즉 시중(時中)이다. 시중은 그 때와 장소에 맞게 그 법을 보이신 것을 말한다.

만덕산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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