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련을 겪으며

 청년운동에 있어 또 하나의 영광은 원청 20주년 행사에 참가한 것이다. 당시 부산교당과 교구 청년연합회의 일을 맡게 되어 자연 20주년행사의 책임을 맡게 됐다. 원청의 이념과 방향모색을 위한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참가해 밤새 토론하던 기억이 새롭다. 신도안과 총부를 오가면서 소중한 인연들을 모시게 되었는데 특히 張淵光·金貞心교무는 출가의 벽을 넘어 동지가 되었다. 뜨거운 정열과 개벽의지에 불타오른 많은 교무님과 청년동지들의 함성은 원청 20주년을 밝게 비추었다. 내삶에 있어 가장 열정에 찬 나날이었다.
 福중에 인연복이 제일이라 하셨는데 좋은 인연을 상생의 인연으로 더욱 이어가도록 노력하기로 다짐해 본다. 특히 법연으로, 혈연으로 이어지길 염원했던 신명교 교무와의 짧은 만남,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노진우 동지의 얼굴이 새삼 떠오른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때 대체로 굴곡없이 살아온 것 같다. 태어나 성장하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큰 변화없이 지내왔다. 자연 신앙생활도 순경 속에서 이어져나갔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연히 대학원 준비중에 교사자리가 나게 됐다. 때마침 군복무를 마친 터라 별 생각없이 근무를 하게 됐다. 첫 직장이 일생을 좌우한다더니 교육계에 첫발을 내딪다보니 지금까지 교육운동에 종사하는 것 같다. 아무튼 준비기간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던 교사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타성에 빠지게 되어 대학원 준비를 놓치게 됐다.
 차츰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직장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막연하지만 국민의식개혁운동 쪽으로 관심을 두고 교단의 선배님들과 의논을 했다. 그래서 우선 야간대학원에 입학하고 주간에는 교육기관에 근무할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서울에서 구하려는 직장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채 늙은 학생이 됐고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게 됐다.
 늦게나마 추진한 서울유학은 이로써 끝이났고 다시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립학교로 재취업이 되었으나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고 난생 처음 학원강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때가 결혼을 앞둔 시기여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다시 박사과정에 진학할 것인가? 직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구나 무엇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같았다. 시련과 좌절 속에서 법신불 사은님께 매달렸다.
 「나 자신과 가정과 사회와 교단에 필요한 사업을 발견하고 참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 일어났다. 힘든 시간 속에서 서울교구장이신 香陀圓 朴恩局교무님께서 부산교구장으로 부임해 오셨고, 장모님과 깊은 인연을 맺으신 昌陀圓 金普現교무님이 영도교당에 부임하셨다. 자리를 잡지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향타원님은 백방으로 힘을 써주셨다. 그러나 때가 아닌지 좀처럼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중 첫딸 예원이가 태어났다. 예원이가 태어난지 얼마후 향타원님께서 우연히 집에 오시어 『서울에는 禮知院이란 곳이 있어 예절교육과 전통문화를 가르치는데 부산에도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부산교당 교도, 부산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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