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곳 없이 간단없는 마음으로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공부하는 도량을 삼아 부처를 이루는 선법으로 본교의 원융무애한 수행 길을 밝힌 표어입니다.


선이란 「원래 분별주착이 없는 참된 성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천만 가지 욕심경계에 물들고 막힘이 없이 참되고 바른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큰 도와 참된 생활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선을 닦지 아니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공부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하거나 실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어 직업을 갖거나 처자가 있어도 못할 것이요 욕심경계와 시끄러운데 처해도 못할 것이라 하여 홀로 산중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서만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만일 조용한 곳에 앉아서만 선을 닦고 경계 속에서 활동하면서 닦지 못할 선이라면 세상에 쓸모 없는 병든 선이라 불안과 고통에서 허덕이는 전 인류를 구원할 산 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품 자체가 한갓 공적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앉아서 무정물과 같은 선을 닦을 진대 무용한 병신을 만드는 일이라 시끄러운데 처해도 마음이 요란하지 아니하고 욕심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여야 참 선이요 참 정이라」하시었으니 어찌 구차히 시간과 처소를 택하여 대승의 수행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무시선 무처선의 공부법은 따로이 시간과 처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우주를 선방 삼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항상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고 천만경계 중에서 동하지 않는 일심정력을 얻는 빠른 공부길입니다. 이 법만 자상히 알고 보면 괭이를 든 농부도, 마치를 든 공장도, 주판을 든 점원도, 정사를 잡은 관리도 누구나 다같이 선을 할 수 있습니다. 더욱 현대와 같이 복잡한 정신생활에서는 원래 착이 없는 마음을 알아서 원래 착이 없는 행을 닦는 선법이 아니고는 잠깐도 마음의 안정과 정화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속에서 경계를 대할 때마다 항상 공부하는 대중을 놓지 않고 안으로 마음 지키기를 허공과 같이하고 밖으로 경계 대하기를 태산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마음을 마음대로 하는 경지에 이르고 보면 일체 법에 걸리고 막힘이 없는 큰 힘을 얻을 것이니 이것을 대승의 활선이라 할 것입니다.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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