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교역자 강습회- 종합회화

중간리드 = 신앙과 수행의 일치, 청렴 담박한 생활
중간리드 = 강당에서의 설교만이 교화의 전부일 수는 없어
중간리드 = 윤리 도덕의 타락은 종교인이 책임져야
○…다음의 글은 지난 17회 교역자 강습회의에서, 단별 회화시간에 「교역자의 자세」란 주제로 교역자들이 공동 토론한 것을 간추려 엮은 것이다. -편집자주-
종교인은 항상 진리 속에서 살아야 한다. 투철한 사명감과 뜨거운 희생적 정열이 종교인의 생명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때로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이익은 헌신짝처럼 버렸던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혼란하고 부패했을지라도 종교가 싱싱하게 살아있다면 그 사회는 구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종교가 타락했을 때 그 사회는 무질서하고 병들게 되고 만다. 따라서 종교인은 언제나 진실하고 성실해야 하며 「진실한 종교인의 자세」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 신앙과 수행의 일치
신앙과 수행이 일치되는 생활이라야 종교인의 참된 모습일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지극한 신념을 가지고 진리를 믿고 섬기며, 결국에는 진리와 일치된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대개의 경우 신앙은 철저하나 수행은 부족하기 쉽다. 삼학 수행에 있어서도 정신수양에만 주력하고 보면 연구와 취사에 소홀하게 된다.
삼대력 공부를 한다고 해서 특이한 생활을 피해야 한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고, 즐길 때 즐기면서도 항상 진리를 떠나지 않는 생활이라야 한다.
종교의 생활화 문제와 생활의 종교화 문제는 마찬가지로 절실한 것이다. 종교에 치우쳐서 생활을 잃어버린 것이 지난날의 잘못이라면 생활에 분망하여 종교를 잊기 쉬운 것이 오늘날의 병폐라 할 수 있겠다. 그러기 때문에 생활속의 종교라 해서 수행(아침 좌선)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이란 많이 쓰면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흩어진 정신을 항상 새롭고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아니고서 어떻게 진실한 종교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신앙과 수행이 일치되어질 때, 종교는 불멸의 생명과 찬란한 빛을 찾게 되는 것이다.
△ 감사 보은하는 생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빛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은 감사하는 생활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새벽에는 염불 좌선으로 맑은 마음을 키우고, 낮에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정신으로 보은 봉공생활을 하며 밤에는 일기와 심고를 통하여 반조공부를 해 가면, 가치 있는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다 진리의 화신임을 알고 내 몸은 사은의 은혜로 살아감을 철저히 느껴서 빚 갚기에 바쁜 생활을 하다보면 결국 복을 짓게 된다.
성불제중이란 오직 남을 위해 일하겠다는 희생적 사명감에서 울어나는 것이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신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행복을 앞세우며 감사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않는 생활은 곧 보은봉공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스스로 복과 은혜를 수용하게 된다.
△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
남을 칭찬하기는 어렵고 비난하기는 쉽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기는 어려워도 남의 잘못을 찾기는 쉬운 일이다.
흔히들 종교인은 스스로 고상한 체하여 남을 얕잡아보기 쉽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속물들이 그럴 수밖에 별 도리 있느냐고 코웃음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세상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않고 속세를 벗어나 도량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회가 혼란하고 윤리 도덕이 타락한 것은 종교인이 참답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참회해야 할 일이지, 속물들의 광란이라 비웃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모든 책임은 종교인이 져야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타락했을 뿐이라고 구차한 변명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역자는 교도의 잘못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직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인은 모든 잘못을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안일보다는 고난의 십자가를 메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다면 그에게 결코 적이 있을 수 없다. 융화 화목하고 이해 상통하고 용서 사랑이 있을 뿐이다.
△ 청렴 담박한 생활
지위도 재산도 없지만 성직자들이 존경을 받는 까닭은 재?색?명 삼욕심에 담박한 때문이다. 명예를 돌덩이처럼 보고 재물을 흙덩이같이 봐버릴 수 있는 청렴결백은 확실히 고귀한 것이다.
황금만능의 사상이 어느 때보다도 횡행하는 현대에 있어서 종교인까지도 금전의 노예가 되는 현상을 자주 보게 된다. 종교인은 정치가가 아니요 기업인도 아니다. 그는 오직 인생이 바른 길을 가르치는 스승일 뿐이다. 돈에 맛을 붙인 종교인의 모습은 추악하고 권력에 아부하면 처참하도록 비굴해 보인다.
이름은 종교인이면서도 사실은 종교상인이나 정치부로커가 많은 현대이기 때문에 권력과 금력에 담박한 종교인이 필요한 것이다.
종교가 사회사업이나 교육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신자들의 재산을 거둬들여, 오히려 호사한 생활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해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시장바닥의 성직자
교화는 설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강당과 설교가 교화의 전부일 수는 없는 것이다.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이 교당을 찾도록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에 교당을 찾는 사람들보다는 저자의 잡상들에게 종교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성직자는 마음은 하늘에 두었을지언정 육신은 중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같이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성직자의 체면만 생각한다면 많은 문제를 지닌 중생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밑바닥 인생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서 그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은 때로는 거리 청소부나 공사장의 노동자가 되기도 해야 하고 삽이나 빗자루를 들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저속해지지 않도록 하면서 어떠한 곳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생명보다 소중한 믿음
어두운 밤에 장님이 길을 인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오늘의 종교인은 복잡 다양한 사회에서 각양각색의 사람을 교화해야하기 때문에 견고한 믿음에서 솟아나는 자기 수양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철저한 신앙심 없이 종교적 인격은 조금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때 보다도 인격과 능력을 갖춘 종교인이 요청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만큼 투철한 신앙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생명보다 소중한 믿음 위에서, 신앙과 수행을 일치시키고, 감사보은의 생활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하고, 청렴 담박한 생활에 만족하며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는 거리의 성직자가 오늘을 사는 종교인이 바람직한 모습인 것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