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반백년과 자선사업
“무자력한 부모형제 알뜰하게 보살피자”
자선사업의 어제와 오늘
-교화·교육·자선
11월은 “자선의 달”. 원기 50년 제13회 임시교정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자선의 달 제정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원기 51년부터는 이 “자선의 달”을 맞이하여 간소하게나마 각 지부 단위로 자선사업에 대한 특별법회를 개최하여 자선의 정신을 앙양하는 한편 자선기관 또는 육군병원 등을 위문, 한 기운으로 연해진 형제들로서 따뜻한 정의를 베풀어왔었다.
자선사업은 교화·교육사업과 아울러 본교가 목표로 하는 3대사업의 하나이다. 본교에서 자선사업을 3대사업 목표의 하나로 정한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노약자를 봉양하고 집과 부모를 잃은 무자력한 고아들을 돌본다는 것은 바로 부모와 동포에 대한 보은의 길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 생활에 종교가 필요한 것은 종교로 인하여 인류생활을 좀 더 부드럽고 윤택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가 있는 곳에 무지와 빈곤과 질병은 도사리고 있다. 이 무지와 빈곤과 질병을 멀리 추방하는 것, 이것이 종교의 커다란 임무라면 임무일 것이다. 여기에 본교 교육사업은 무지로부터 자선사업은 당면한 빈곤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광대무량한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적극적 사업이라 하겠다. 따라서 자선사업은 교화·교육사업 못지 않게 인적 경제적인 면에서의 교단적인 뒷받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반백년의 연치를 자랑하며 원불교는 점점 성숙되어가고 있다. 특히 반백년 성업 결실을 눈앞에 두고 4번째의 자선의 달을 맞이하여 교단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교화·교육·자선을 교단 3대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자선사업은 어딘지 모르게 소홀히 추진되고 있는 것만 같아 아쉽기만 하다.
2. 자선사업의 어제
-8·15해방과 전재동포 구호사업-
일제의 압정에서 풀려난 원기 30년(1945) 8·15해방을 맞이하면서 본교에서는 교화·교육·자선 등에 적극성을 띄우기 시작했다.
즉 해방을 맞으신 정산종사께서는 즉시 한글보급·전재동포 구호사업·교육기관설립 등을 3대 건국사업으로 발표하시고 이의 추진을 적극 권장하시니 원기 31년 유일학림의 설립은 오늘날 원광중ㆍ고와 원광여중ㆍ종합고ㆍ원광대학의 모태가 되었고 전재동포 구호사업은 오늘의 자선기관 설립의 효시가 되었다.
당시의 구호사업은 첫째 구호 본부를 설치하여 전재민과 해외로부터의 귀환동포에 대한 숙식제공 둘째 전염병(당시에 만연하던 장질부사 등) 환자들의 격리간호 및 치료 셋째 전재고아들의 집단보호 등이었으니 전교역자와 교도의 일심합력의 결정체이었다.
이러한 구호사업은 주로 서울·부산·전주·이리 등지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3대 건국사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명실공히 거교적이었고 이 사업으로 인하여 본교의 명성이 사회에 드러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한편 구호사업 도중에 교역자의 손실도 없지 않았으니 주산 송도성 종사께서는 구호사업에 진력타가 순교하시었으며 여러 교역자들이 전염병에 감염되는 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아봉공의 신념으로 불쌍한 내 형제를 돕겠다는 거룩한 뜻은 영원불멸 이 회상의 찬란한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고아원·양로원의 설립-
원기 30년도 전재동포 구호사업의 책임자인 유허일, 송도성 선생 등은 구호사업을 마친 후 전쟁고아들의 집단보호가 계속되어야 하는 실정에 비추어 전쟁고아 1백여 명을 집합하여 서울 한남동 산 10번지(현 서울수도원)에 집단수용, 보화원(원장 황정신행)이란 간판을 붙이게 된 것이 본교 자선기관 설립의 처음이다.
그 후 경제적인 여건을 포함한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무아봉공의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여 5, 6백 명의 고아를 수용하는 큰 기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원기 35년 6·25동란 중에도 고아들을 돌보기에 정성을 다했었고 1·4후퇴 때는 익산총부로 피난, 익산보화원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고아를 돌보는 육아사업은 교단에서 적극 지원 원기 38년에는 이리시로부터 이리보육원을 인수하였고, 이어 군산시로부터 시립고아원을 인수하여 원광애육원이라는 이름으로 군산지부에서 직영해왔었다. 그러니까 원기 38년까지만 해도 서울보화원을 비롯하여 4개의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로원의 설립은 재가교도의 발기 또는 회갑의연금 등을 기금으로 이루어졌다. 원기 32년에 설립된 당리수양원(부산)은 한 요인의 회갑기념 의연금을 기금으로, 개성수양원과 전주양로원은 재가교도의 발기로 이루어졌던 것이며 양로원(현 중앙수양원)은 전무출신의 만년수양기관으로 원기 34년에 설립되었다.
창립 제1대를 마감하는 원기 39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육·자선·사업 등이 활발하였던 것은 해방으로 인한 사회적인 요청이었다고 할지는 모르나 아무튼 새 시대의 새 종교상을 부각, 교단 미래의 사업방향을 터 잡아주는 태동이었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오늘의 자선사업
-자선사업은 혹 소외되고 있지는 않나?
원기 39년대에 활발했던 자선사업은 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활기를 잃은 감을 준다.
규모를 자랑하던 서울보화원이 해체되고 익산보화원이 이리보육원에 합병되는 등 지금에 와서는 90명의 고아를 수용하고 있는 이리보육원(이리시 마동) 단 하나만을 육아사업기관으로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리보육원은 1934년에 창설 이리시에서 직영해 오던 것을 원기 38년 이리시로부터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태양처럼 뜨겁게” “종달새처럼 즐겁게” “냇물처럼 꾸준히”라는 원훈 아래 90명(남54·여36)의 어린 형제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내는 정경은 눈시울을 적셔준다.
타종단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처럼 외국자선재단의 원조는 없지만 약간의 국가보조와 1만5천여평의 전답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채소 그리고 축산(양계·목우) 등에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자체운영(이후로는 5면에 있음)을 하고 있어 급식 면에 있어서는 타 고아원보다는 좋은 실정이다. 그러나 자선사업은 소비사업인 만큼 정기적인 운영자금의 확보는 시급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장기의 어린이에게 정서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한 실정임에도 어린이들을 위한 복지시설(운동기구·의료시설·도서실·놀이터시설 등)이 전무한 것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양로사업에 있어서는 전무출신의 만년수양을 위해 발족된 중앙수양원이 장족의 발전을 계속 현재 30명(남7·여23)의 원로가 수양에 정진하고 있으며 원기 33년에 창설된 전주양로원은 여러 사정으로 중지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원기 51년 현 위치(전주시 덕진동)로 옮기면서 정비 강화되어 면모를 일신, 지금은 20명(남1· 여19)의 원로가 법락을 누리며 새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 양로원도 고아원고 마찬가지로 부동산 수입으로 자체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자선기관이 교단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어서 이처럼 발전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 자선기관장을 중심한 임원일동의 천신만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자선기관 운영 실무자들은 교화·교육·자선을 3대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자선사업에 대해서는 교단적인 관심이 적은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문적인 사회사업가의 필요는 물론 많은 경험과 기술적인 종사자를 개발하고 기르는 일, 그리고 폭넓은 양로사업을 위해서 교단에서는 적극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라고 한다.
자선사업은 후진으로서 후진의 도리를 다하는 동시 복지사회 건설의 첨병이기도 하다.
해마다 맞이하는 자선의 달 더욱 반백년 성업을 내다보며 지난날 교단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더욱 더 보람찬 사회사업을 자랑스럽게 전개해 보자. <聖>
원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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