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에 새 불토 고요한 아침나라 무궁한 그 영광 우담화 피었어라. 정주라 고요히 삼천년 기다린 터 빛나다 영광 땅 억만년 우리 성지-.
원불교의 발상지 성지 영산을 기리는 노래다.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탄생하시고 진리를 깨치셨던 원불교의 고향이다.
대종사님의 기도터, 삼밭재 마당바위, 일원의 진리를 깨치신 노루목, 9인 선배님의 혈인 기도터, 옥녀봉 구간도실, 정관평 옥토, 오늘의 우리 원불교가 움텄던 새 불토, 원불교의 얼이 뭉쳐있는 우리의 성지 영산이다.
대종사님의 탄생, 구인 선배님의 혈인기도, 정관평의 방언공사, 이 모두 원불교사에 길이 빛날 성스러운 일,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의 고향으로서 영산성지를 기리는 것이다.
이 성지에 오늘도 신성 공심 융화 주밀을 원훈으로 44명의 선원생들이 대종사님의 정신을 이어받기에 분주하다.
영산선원은 동산선원 원광대학과 더불어 원불교 교역자 양성의 삼총사다.
원기 12년에 처음 영산학원으로 발족하여 고 정산법사님과 주산종사님이 원기 28년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현재 4~5십대의 교단 중진들이 대부분 이 때 영산학원 출신들이다.
원기 29년부터 31년까지 일제 말의 혼란으로 중단했다가 32년부터 이군일 박제봉 선생의 지도로 다시 학원생들을 교육했다. 그러나 35년 6·25사변으로 인하여 또다시 쉬게 되었고 원기 37년 이중화 교무의 지도로 개원했다가, 원기 42년 영산재방언공사로 휴원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영산선원이 다시 발족한 것은 원기 49년 3월 1일이었다. 당시 정산종법사의 뜻을 받들어 중앙선원 동산선원과 함께 3대 선원으로 힘찬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40여 년의 역사를 통하여 교단의 일꾼들을 양성해 오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단되기 3번, 그야말로 민족사와 교단사를 함께 호흡했다.
원불교 반백년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영산선원의 발자취는 칠전팔기의 가시밭길이었다.
원기 49년 3월에 새로이 발족한 영산선원은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중등반(53년도 폐쇄)과 교역자의 초급훈련 과정인 선원으로 나누었고 원장엔 안이정(현 중앙총부 교감)씨였다.
51년도에 46명을 내었고, 52년도에 46명, 53년도에 15명, 54년도에 15명 도합 12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54년 10월 현재 오종태 선생을 원장으로 하여 교무 이혜정, 교사 장응철, 서성범, 최세진, 문국선씨 등이 1학년 25명 2학년 19명의 선원생을 가르치고 있다.
학과목을 보면 정전, 대종경, 교사, 예전, 강연, 회화, 작업, 음악, 의견교환, 교헌, 불조요경, 불교사, 종교사, 세계사, 국사, 한문, 영어, 수학, 국어, 작문, 체육, 습자, 주산 등 폭넓은 과정이다.
현재 선원교육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① 원불교의 창립정신에 바탕한 전무출신 정신 체득의 산 교육을 말할 수 있겠다.
반세기 전 대종사님과 선진님들이 살다간 그 터전에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생생한 정신을 직접 체득한다는 것은 다른 교육기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인 것이다.
선원생들은 교단창립의 얼을 일상생활 속에서 체득하는 것이다.
처음 온 어느 선원생은 일기장에 「성지 성지라 하여 큰 기대를 가졌는데 막상 와보니, 찾기 힘든 궁벽산촌이요 전기도 없고 고통도 불편하여 모든 생활이 어려울 뿐 여기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라고 불평을 적었다.
그러나 1년이 못가 그 학생은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종사님의 거룩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바위 한 개, 흙 한 덩이에서도 원불교 얼을 심장으로 보았다. 현대문명의 이기가 어찌 이 위대한 혼에 비길 수 있을 것인가? 복잡 화려한 도시보다 한가하면서도 절절한 이 성지의 얼을 체험하게 된 터질 듯한 기쁨이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하게 되었던 것이다.
② 영육쌍전의 실천을 통한 종교적 인격의 형성을 들 수 있겠다.
현대문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있지만, 방언공사의 정신을 직접 체득하기 위하여 일하면서 공부하는 영육쌍전의 교육을 받고 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더라도 영산선원처럼 수도하며 일하는 종교적 인격형성은 어려울 것이다.
수업일수와 작업일수를 보면 2:1의 비율이다. 언뜻 보면 작업이 너무 많은 것 같으나, 그렇기 때문에 영육쌍전의 훈련이 가능하기도 하다. 비교적 건강한 몸과 넘치는 법열 속에 그들의 인격은 알알이 영글어 가는 것이다.
선원장 형타원 오종태 선생에게 몇 가지 궁금한 일을 물어본다.
-전망이나 계획은?-
<현재는 정산법사님의 유시를 받들어 초등선원의 임무를 가지고 있으나 앞으로는 독립선원(4~5년)으로 발전하여 인재양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본다. 정산법사님께서 터까지 잡아주신 옥녀봉 기슭에 선원 신축계획을 원기 60년대에는 완성할 것이다.
앞으로 성지순례자와 관광객이 많을 것을 예상한다. 따라서 성지장엄은 시급한 문제다. 대종사님의 성탄지, 대각터, 구간도실 등의 미화작업과 성비 건축을 서둘러 해야겠다.
선원생들의 교육은 구인 선진님들의 창립정신을 그대로 찾아보고 실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야말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산 교육을 시키겠다.>
-교단에 요청하고 싶은 점은?-
<성지 장엄이 외적인 건물의 장엄에 있는 것만은 아니지만, 성지가 너무 초라하면 후진들이 소홀했다는 책임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성지 장엄 사업에는 범교단적인 협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학문적 바탕 위에 종교적 훈련을 쌓아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시대가 천만번 변천한다 해도 우리는 대종사님의 근본 훈련법을 놓아서도 안 된다. 따라서 확고한 정신적 바탕 위에 학문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무출신 지원자는 누구나 영산 성지를 거쳐가도록 하는 방법이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지리적 여건으로 문명의 소외지대가 되고 말았다. 전 교도들이 관심을 가져 도서, 오르간, 의약품 등을 보내주고, 정신적 응원을 보내주길 바란다.>
잠깐 눈을 돌려 이웃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런 산골이지만 선원생들이 수십명이 있기 때문에 씁쓸하지 않습니다. 방학 때에는 텅 빈 것 같지요. 선원생들의 작업하는 것을 보면 옛날 대종사님과 제자들이 방언공사 하던 일이 연상됩니다. 일손이 모자랄 때 가끔 부탁 일을 협조해 주는 것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가슴을 뭉클케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성인도 가고, 성인의 발자취도 사라져 가지만, 오늘 선원생들이 있어 반세기전 이 산골에 있었던 성스러운 일을 다시 보게 되니 행복한 마음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자의 가슴에도 무언가 치미는 게 있다. 감격이라는 것 일게다.
선원생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살펴본다.
새벽 5시 일어나서 좌선 체조 청소를 하고 아침 식사는 7시 30분, 오전 수업이 8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오후 수업은 2시부터 3시 50분까지 취침은 저녁 10시, 원불교 교단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과다.
3월 개강, 하기 동기 두 차례의 방학, 2월 졸업도 여느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에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랑이 있다. 그것은 매일 수업이 끝난 후에 정관평의 언답을 거닐거나, 대종사님의 탄생지, 대각터, 구간도실터 등을 참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이다. 1년 중 농번기에는 구인선진님들이 개척한 광대한 땅에 직접 모를 심고 벼를 베고 타작을 하며 창립정신을 실제로 체득해본다는 사실이다.
영산은 원불교의 성지요, 원불교인의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 교단 초창기의 성스런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영산선원은 인재양성 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창립정신을 직접 체득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다. 우리는 대종사님의 수많은 후신들이 양성될 것을 기대한다.
영산선원으로 눈길을 돌려 그 힘찬 발전을 축원하며, 영산선원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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