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한 다음에도 수행이 없으면
청정자성이 현실경계에 물든다

 [23] 한 제자 여쭙기를 「견성 성불이라 하였사오니 견성만 하면 곧 성불이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근기에 따라 견성하는 즉시로 성불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드문 일이요 대개는 견성하는 공보다 성불에 이르는 공이 더 드나니라. 그러나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하였지마는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거개의 수도인 들이 견성만은 일찍이 가정에서 쉽게 마치고 성불을 후가 이하여 큰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을 들이리라.」
 돈오돈수의 입장에서 보면 견성 곧 성불이 된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입장에서 보면 견성한 다음에도 성불을 위한 수행이 필요하다. 돈오돈수가 옳으냐 돈오점수가 옳으냐에 대해 논쟁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불필요한 것이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다만 보는 관점이 차이일 뿐이다. 결과만을 놓고 볼 때에는 돈오돈수가 되고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돈오점수가 된다.
 이 법문에서는 돈오점수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여 설명하자면 견성이라는 것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깃을 알고 있다는 뜻이요, 성불은 알고 난 다음에 직접 가보아서 그 길을 확실하게 체험하고 증득한다는 뜻이다. 다른 비유로 야구 선수의 경우를 설명해 보자. 투수가 공을 던지는 법을 아는 것은 견성이요, 공 던지기 연습을 꾸준히 계속해서 타자가 치기 어려운 공을 던지는 기술을 습득한 것은 성불의 경지라고 할 수 잇다. 타자의 경우에도 공을 치는 법을 아는 것은 견성이요, 타격연습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강타자의 실력을 쌓는 것은 성불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농업경제시대, 곧 1차 산업시대에는 사람의 생활도 단순했고 복잡한 경계도 별로 없었다. 그러한 2차 산업 3차 산업시대에는 사회도 다양화해지고 경계도 많고 생활형태도 복잡하다. 그래서 1차 산업시대에는 견성한 다음에 성불의 수행이 별로 없어도
경계에 끌려 다니지 않고 청정자성 그대로를 지키며 살아가기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견성한 다음에도 성불의 수행이 없으면 자칫 경계에 끌려 다니기 쉽고 청정자성이 현실 경계에 물들기 쉬운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인들이 사회악에 쉽게 물들어 버리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사람의 지식이 한없이 발달하고 교육정도도 높아져가고 있다. 다양한 정보교환도 쉬워서 과거에 말하는 견성 정도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국민학교 정도에서 견성하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지식수준의 발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요 사회 생활 속에서 체험을 통해 인격을 향상해 가기 때문에 견성 다음에는 양성ㆍ솔성이 필요한 것이다. 같은 수준의 견성이라면 현실 생활 속에서 많은 체험을 한 사람이 성불의 경지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원불교에서 훈련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연습을 많이 할수록 유능한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훈련을 되풀이 할 수록 대기대용, 신통 묘용의 조화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에서 성불제중이란 말고 함께 제생의세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실천ㆍ체험ㆍ참여를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의 경지는 혼자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고, 체험하고, 나아가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시키고 사회를 개혁해 가자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타락하기 쉽고 도덕성이 병들기 쉬운 산업문명ㆍ물질문명 앞에서 진리의 체험ㆍ확인ㆍ증득을 통해서 성불의 힘을 길러 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보다 성불이 더 어렵고, 성불은 반드시 개인 수행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구원에까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