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권 강의

반야심경은 팔만장경의 정수요 요령을 집대성한 것이다. 2백60자로 된 짧은 경이지만 부처님의 중심 사상이 다 들어있다.
그 뜻을 해석하고 설명하기보다는 항상 수지독송해야 하는 것이다. 외우고 외우고 자꾸 외워서 그 외우는 소리가 청정일념이 되어서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오는 때가 참으로 반야심경을 체득하고 활용하는 때라 할 것이다.
너절한 설명을 부친다는 것은 잘못하다 보면 오히려 큰 뜻을 상하기 쉽다.
당의 현장법사가 큰 책임을 지고 인도로 들어갔을 때 마침 여름철이라 비가 많이 와서 아무런 활동도 못하고 방안에 들어박혀 있었다.
비는 쉽사리 개이지 않고 중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내고 있었을 때, 그 집 주위에는 온갖 흉악한 산짐승들이 모여들어 소란을 피웠다.
그 또 현장법사는 어떠한 실력을 빌려야만 인도까지 온 임무를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때마침 우연히 어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서 반야심경을 지나가는 말로 단 한 번 일러주었다.
그 노인은 「너의 중대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분별견해를 떠나서 이 경을 많이 외우면 큰 힘을 발휘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장법사는 반야심경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꾸 외웠다. 마침내 사나운 짐승들은 다 물러갔고, 현장은 목적한 일을 다 이룰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은 군더더기 살을 부쳐 해석하지 말고 자꾸 외우면, 나와 반야심경이 하나가 되어 큰 힘을 얻게 되고 반야심경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뜻을 풀어서 해석한다는 것은 조그만 참고에 지나지 않을 뿐, 마음속의 반야심경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심경을 통해서 각자의 마음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말을 듣는데 심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경을 통해서 마음속의 심경을 발견해 내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마치 연기를 보고 산너머에 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듯이, 경문을 통해서 마음속의 심경을 발견한다는 일이 중요하다. 연기는 불이 아니다. 경문도 문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도를 구하기를 다 바라고 있지만, 멀고 어려운 곳에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구하지 못하고 말게 된다. 도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이고, 쉽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종이에 글로 쓰여져 있는 심경은 멀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심경은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은 활용해서 자기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반야바라 밀다심경>
중생이 변해서 부처가 되려면 자기 마음의 광명을 통해야 한다. 마음의 세계를 통하지 않으면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될 수 없다. 내 마음 가운데 광명을 통해서야만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가게 된다. 그 방법을 말한 것이 반야바라 밀다심경이다.
반야란 지혜, 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고 마음 밑바탕에서 우러나는 광명, 자성의 혜광을 말한다.
바라밀다는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혜를 통해서 가게 된다. 육신이 아니라 마음이 건너가는 것이다.
심경은 계합, 지름길의 뜻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은 그 제목만 바로 알아도 충분하다. 본문은 새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각자의 마음만 밝혀놓으면 바로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방편을 통하여 권장해 놓은 것이다.
<관자재 보살>
좁은 뜻으로 말하면 보살중의 자비를 대표하신 대자대비 관자재보살이다. 즉 자비보살의 상징이다.
넓은 뜻으로는 각자의 마음이 바로 관자재보살이다. 각자의 마음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넓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관자재란 내 마음이 주재한다는 뜻이다. 보살이란 내면적 인격으로서 자각각타의 경지다. 자기의 일을 해결하고 남의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지견이 생긴 사람을 말한다.
이 인격이 보살행으로 나타날 때 의행이 된다. 자리이타 육근동작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체대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자리이타이다.
자각각타는 두 길이 아니다. 내가 나를 확실히 알아버리면 다른 것의 진리를 알게 된다. 자리아ㅣ타는 내가 이롭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이롭게 해주면 저 쪽도 이롭고 나도 이로워서 자리이타의 도가 나타난다.
관재보살이 되려면 그 심법이 나의 진리와 타의 진리를 알아야 하고, 일체행위를 자리이타로 쌓아가면 그가 바로 관자재보살이다.
<이 강의는 지난 10월 교역자 강습회에서 이운권 선생께서 강의한 것을 편집자가 간추려 엮은 것임.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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