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죽음 통해 인연의 소중성 깨달아
주위 아는 사람들에게 관심 갖는 계기

 일요일 저녁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교당 후배의 목소리였다.
 좀처럼 우리 집에 전화를 하지 않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것이 왠지 불길한 소식이라도 전할 것 같은 순간적인 예감이 들었다.
 『형, ○○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뭐라고』
 이제 겨우 22살인 교당 청년회 여자 법우였다. 자세한 상황을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차후의 계획을 의논하고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방바닥에 앉았다. 얼마전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한 지 한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다.
 같은 일이 두 번씩이나 찾아들어 끝내 속세와의 인연을 끝낸 것이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전생의 지은바 대로 받는다고 해도 이렇게 몰인정한 것이 하늘인가.
 순간 작년 10월에 열반하신 성철스님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열반에 깊은 애도의 뜻을 가졌고 신문이나 TV에서는 연일 그의 죽음을 크게 기사화 했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를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화제와 관심거리였다.
 세상에 보기 드문 큰스님이며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어왔던 분이라고 들 했었다. 그동안 스님을 몰랐던 무관심했던 사람들까지 몰려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이 교통체증까지 있었다고 한다.
 후배의 죽음과 성철스님의 열반의 차이가 무엇일까. 한 사람은 삶의 근본과 세상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일깨우다 고령의 나이에 열반을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생각해 볼 겨를조차도 없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혹자들은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혹자의 입장이고 나에게는 똑 같은 죽음에 대해 너무도 불공평한 결말이었다.
 또한 나에게는 성철스님보다는 후배가 더 중요한 삶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삶이 몹시도 구차스럽게 느껴진다. 스님은 적어도 고행의 길이었지만 자신의 하고자 하는 수행의 길, 깨달음의 길을 걷다가 열반을 하셨고 후배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 삶을 마감했다.
 결국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없고 하늘에 따라 좌우되는 피동적 삶만 존재하는 것일까!
 스님은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후배는 소수의 관심이 대다수의 입장에서는 무관심(?)과도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에 이런 죽음이 - 대다수의 무관심 속에 잊혀지는 삶이 - 얼마나 많을까.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 따로 방을 얻어 산다고 얼마 전 에 들었는데 그 내막을 나는 알지 못했다. 사회라는 바쁜 수레바퀴 틈에서 자연스럽게 내 주위의 인연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이다.
 어떤 죽음은 죽어서도 세인들의 관심이 가고 더 그를 거룩하게 하고 무관심이 관심으로까지 발전을 하는데 어느 죽음은 생전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남은 자의 면목 없음과 가슴을 아프게 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던 것이다.
 세상의 산업화와 고도의 문명 추구는 언제부터인가 인간 그 자체에는 소홀해지고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한 개체만이 강조되어 왔다. 결국 그 개체(스님이나 후배 모두)는 죽어야만 우리들의 관심을 갖게 되고 드디어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모든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존엄하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위인만이 존엄하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서로 인간적 관심을 갖고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좀 더 여유 있다 삶을 살아야겠다. 사회적 지위를 위해 무작정 뛰는 어리석음도 버리고 자기 일에만 연연하여 주위에 무관심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겠다. 앞으로의 죽음들이 내 주위에서는 없도록 내가 아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것이 후배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의미 있고 뜻 있게 하는 길이리라.

정선종<부천교당 청년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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