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소외지대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가다
미지의 스와지랜드
안효정 선생내외 24년 동안 의료봉사
집안 곳곳 한국적 풍속도 그대로 간직

사진>스와지랜드 엠바반정부병원 안효정 선생님과 함께 의약품 전달.
 아프리카의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케냐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우리는 이제 발길을 스와지랜드로 옮기고 있다. 공항까지 전송 나온 분들의 따뜻하고 고마운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 안에서 방금 헤어진 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행여 소용될까봐 빈 가방까지 챙겨들고 나온 양영자 선생님. 그 분의 온갖 배려로 나는 아름답고 잊을 수 없는 케냐의 많은 추억을 간직하게됐다.  양 선생님과 기약 없는 아쉬운 작별을 했지만 마음 안에서는 가깝고 귀한 친지의 한 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이로비에 있는 동안 내 집처럼 편히 머물던 켄코의 몇 날도 어느 듯 옛날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생각이 미지의 스와지랜드를 더듬고있는 동안 비행기가 스와지랜드 땅에 내려앉는다.
 이곳 국제공항은 우리나라 시골의 간이역과 다를 바 없어서 몇 발자국을 옮기니 공항 밖이었고 거기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한국 분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24년 동안 의료활동을 하고있는 안효정 선생님 내외분이다.
 『이곳 아프리카 땅까지 우리를 찾아와 주시다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고맙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안 선생님은 우리의 방문을 진심으로 고마워 하셨다. 회갑이 지난 안 선생은 풍채는 좋으셔도 백발이 성성했다.
 공항으로부터 이 나라의 수도 엠바반까지 40여분이 걸렸다. 그분은 아프리카에서 지낸 세월들을 회상하시는 듯 어렵고 힘들었던 이야기와 보람 있었던 일들을 손수 운전하며 들여주었다. 우리의 승용차는 이러 저리 산비탈을 오르고 있다. 차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아름다운 산들이 그림처럼 스쳐간다. 자구만 오르는 가 싶던 차는 자카란다 오동보라 꽃이 만개한 나무아래에 세워졌다. 우리가 여장을 풀게 될 호텔이다.
 잘 가꾸어진 큰 정원과 아가 자기한 호텔구조가 마음에 든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화병에 꽃이 풍성하게 꽂힌 아름다운 수채화가 녹색 테를 두르고 침상 위에 걸려있고 튼튼한 원목가구들이 부드러운 나무빛깔을 자아내고 있어 호텔의 격조를 높여 주고 있는 듯 했다. 얇게 드리운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짙은 운무에 가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 아래 담장과 그 아래에는 이름 모를 남국의 꽃들이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있어 더욱 청초해 보인다. 나는 슬며시 착각의 환상에 빠지고 싶었다. 아까 보았던 산과 서구 풍의 호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 꼭 스위스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운 아프리카를 저만큼 밀어내고 아름다운 상념의 물결을 일구자 여행자의 행복감이 촉촉이 스며들고 있다. 무엇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은 나만의 세계에 깊이 몰입하고 있는데 안 선생님댁 저녁 초대에 갈 시간이 됐다.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동안 이디오피아에서는 유민철 선생님과 공선섭 대사께서 집으로 초대하여 정성 가득한 만찬을 베풀어 주셨고, 케냐에서는 나원찬 대사께서 또 그런 환대를 해 주셨다. 양영자 선생님은 비싼 음식과 쇼를 보여주어 아프리카 무희들의 춤을 구경했었다. 그분들의 그 같은 배려는 매번 고마움에 앞서 나의 경우에는 과분하다는 생각과 나라밖 공관에 계신 분들이 참으로 일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안 선생님 댁을 가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해온 김이랑 멸치랑 작은 선물가지를 챙겼다. 이곳 의료진들에게는 친정 식구와 다름없을 코이카 홍보팀 두분과 함께 네 사람이 갔다. 그분 댁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나라 의사 분들이 아프리카에서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고 계시는지를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세월을 거슬러 우리가 가난하던 때 한국의 어느 중산층 가정을 보는 것 같았다. 방안에는 이국적인 것이라곤 어느 한 물건도 찾아 볼 수 없고 오랜 세월 손때묻은 살림들이 예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분 댁은 아프리카 안의 한국이었다. 안 선생님의 차를 탔을 때도 그분은 우리나라의 흘러간 옛 노래를 즐겨 듣고 계셨다.
 이 분들이 나라 밖에서 한국인의 긍지를 갖고 사시는 모습. 그리고 한 순간도 고국을 잊지 않고 지나는 모습으로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저녁식탁에서도 서양요리는 한 가지도 없이 모두가 우리네 전통음식 그대로이고 안 선생님 부인의 순박함과 인정 많은 모습조차도 예스럽기만 하다. 시대 따라 많이 변해버린 우리나라에서는 그분과 같은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그분들은 1969년 모국을 떠나올 때 그때의 한국적인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사라져 버린 풍속도가 아프리카에서 건강하게 숨쉬고 있다.
<교무ㆍ강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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