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부터 익혀온 보시심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상담자
한정원 교무 어머니 이기선행 선생편 1
열 네살의 신부
마음의 폭이 넓어 어느 누구라도 감싸안아
외딸 학업 중단시킨 옹고집 남존여비사상

 충청남도 서산, 이곳은 나의 어머니가 태어난 고장이며 결혼하여 자신의 생애를 가꿔온 땅이기도 하다. 또한 서산이란 곳은 나의 출생지이기도 해 언제 생각해도 포근하고 정답다.
 나의 어머니(숙타원 이기선행)는 서산군 고북면에서 애국지사인 외할아버지(이원생)와 외할머니(청송 심씨)사이의 1남 2녀 중 둘째 딸이었다.
 어머니 친정은 일찍부터 개화하는 집안이었다. 서당교육만이 아닌 학교교육을 통해 신학문에 다가섰고 외할아버지는 일제치하에 중국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는 등 지역발전에도 상당한 공적을 쌓으셨다.
 1930년대 외할아버지는 군자금 마련 차 서산에 오셨다가 일경에 잡혀 공주감옥에서 3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시면서도 외할아버지는 서산중학교를 설립하는 교육사업을 추진하시어 후세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보이셨다. 8ㆍ15해방이후 외할아버지는 초대 입법위원(재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셨고, 6ㆍ25가 일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이러한 외할아버지의 생애를 통한 공적을 높이 평가한 서산군민들은 군청 앞에 애국지사 추모 비를 세워 길이 그 훌륭한 애국심을 전하고 있다. 외삼촌 역시 서산군수로 재직하셨고 국회사무장도 역임 하셨는데 6ㆍ25때 납북되었다.
 나와 외가가 남달리 신식교육을 일찍이 받아들였지만 유교적 사상의 뿌리는 어쩔 수 없었음인지, 여자들에 대한 교육은 그대로 안방교육에 그쳤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고 부녀자로서 갖춰야 할 부덕을 익혀 열네살 어린 나이에 서산군 해미면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한창우)에게 시집을 오셨다. 농업이 주업인 시가에서의 생활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서산은 밖으로 서해와 맞닿아 있어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안으로는 농경지가 많아 충청남도의 여러 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중 그 수확량이 첫째가는 것이 많다. 그래서 흔히 서산 땅을 가르켜 「한해 농사지어 세 해 먹고 살수 있는 곳」이라고 하기도 하며 이곳으로 발령을 받은 관리들은 「울고 들어 왔다가 울고 나가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결혼해서 살아오신 해미면은 조선시대 서해안 방위를 위한 군사 요새로 다듬어지기 시작하여 성종때 완성된 읍성이 있다. 이 읍성은 동ㆍ서ㆍ남쪽에 문을 한 개씩 달고 서해로 들어오는 왜구를 감시할 수 잇는 정자를 세웠으나 남문인 진남루만이 남아 있었다. 1963년 사적 116호로 지정되고 1973년에는 복원 정화사업으로 동문과 서문을 복원했다.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보시 심이 강하셨다. 따라서 마음의 폭이 넓어 어느 누구라도 모두 감싸 안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숙께서도 어머니를 좋아하셨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와 상의하시어 일이 성사되도록 했다.
 나의 아버지는 일어도 잘 하셨고, 역량이 있으셨다. 그래서 결혼 후 외할아버지께서 데리고 가서 한동안 바깥생활을 하도록 하셨다. 그러다가 우리집안을 꾸려가야 할 형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나는 형님 한 분과 누나 한 분을 위로 두고 태어났다. 그러나 형님과는 열살 차이가 났고 누나와도 일곱 살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귀히 여기셨는데, 그러다 보니 외딸인 나의 누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 누나에게 남동생인 나를 업혀 키우느라 3학년에 재학중인 누나를 그만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철저한 남존여비사상으로 뿌리내린 어머니의 의식 때문에 누나는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고, 나는 그 덕(ㆍ)으로 누나 등에서 자랐으며 또한 누나는 뒷날 일어를 가르쳐 주는 나의 유일한 독선생 역할까지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누나에게는 죄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남을 돕는데 여념이 없으셨다. 이런 일로 아버지와 가끔 다투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림살이에 대한 예산과 계획이 있는데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에게 보시해 버리셨기 때문이었다.
 황굴 댁이란 칭호로 불리었던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상담 자이기도 했고, 문제해결의 해결사이기도 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어머니가 관여하면 묘하게도 풀렸다. 안될 일도 되는 이치가 있었다. 그것이 인과의 이치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의 기운이 응하면서 결과적으로 성사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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