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권 강의

<수상행식 역부여시>

수상행식 즉 각자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천만가지 분별심도 결국은 진공실상에서 나온 것이다. 진심과 망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제 법공상>
이러한 모든 법들이 결국은 진공실상을 토대로 해서 나오는 것이다. 경계와 진공을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다.
<불생불멸>
그러한 진공실상은 불생불멸인 것이다. 생이 없기 때문에 멸도 없는 것이다. 여여자연할  뿐, 생멸상이 끊어진 자리다. 생멸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로 본 것이다.
<불구부정>
진공실상에는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다. 둘이 아니므로 때가 끼이지도 않고 조촐하지도 않는 것이다. 부처는 부처이고 중생은 중생이라고 구별해서 생각하면 부처와 중생을 바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증불감>
부처님이라 해서 그 본성 자리가 더하고 중생이라 해서 덜하는 것도 아니다. 본래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이다.
<시고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의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그렇기 때문에 이 진공실상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딪침과 법도 없으며, 또한 눈 경계와 의식의 경계도 없는 것이다.
일체의 분별식심이 없기 때문에 육근, 육식, 육진의 18계가 다 없는 것이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또한 윤회의 비롯인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윤회의 끝인 늙고 죽는 것도 없고 늙고 죽는 것이 다 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다.
진공실상에는 순환이 없기 때문에 십이인연도 없는 것이다.
<무고집멸도>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이루어지는 사제의 법문인 고집멸도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세계는 괴로움의 집단이요 부처의 세계는 괴로움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는 법문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무지역무득>
지혜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끊어졌다. 가르치는 부처와 배우는 중생, 스승과 제자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는 지혜나 또한 얻을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이무소득고>
그러므로 아무 것도 얻을 바가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 공부를 하신 보살은 분별 망상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이다.
<심무과애>
그러므로 마음 가운데 아무 것도 걸리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마음은 형상이 없는 고로 걸리는 자취를 모르는 것이다.
<무과애고 무유공포>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공포가 다 떨어졌다.
중생은 재물이 있으면 없어질까 두렵고, 권력이 있다가 떨어질까 무섭고 생사에 얽매이기 때문에 공포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공포심도 또한 없는 것이다.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이와 같이 전도와 몽상을 멀리 떠나서 결국에는 열반을 얻게 된다.
중생은 마음이 걸리고 막히어 자빠지고 엎어지고 거꾸로 되어있지만 그것을 오히려 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전도몽상을 멀리 떠나면 거기가 바로 열반 자리인 것이다. 죽은 뒤의 열반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열반인 것이다.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공부에 의지한 까닭에 즉 자기 마음을 정화하여 그 광명을 밝혔기 때문에
<득아뇩다라 삼맥삼보리>
아뇩다라 삼맥삼보리를 얻었던 것이다. 즉 무상대도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신비스런 주문이요, 일원보다 크게 밝은 주문이요, 더 크고 위가 없는 주문이요, 상대가 없는 절대의 주문이기 때문에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멸하는 주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주문은 진실해서 거짓이 아니요 헛된 것이 아니며, 허장성쇠가 아닌 사실에 부합된 것이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주문을 설하는 것이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건너가자 건너가자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가자,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모두모두 빨리 건너가자.

이 반야심경은 해석하기보다도 늘 외워서 음성과 마음이 하나로 조화되어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사상이기 때문에, 각자의 마음이 바로 관자재보살이 되어서 그 마음을 정화시키고 현실 사회를 정화시켜가야 하는 것이다.
글자 속에 들어있는 심경에 국집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경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원불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원불교 밖의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끝>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