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은 어떠한 불법이며 생활은 어떤 생활인가.
종교는 영원한 삶의 귀의처지만
생활을 떠난 진리는 무가치한 것

열 사람이 모이면 열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다고 십인십색이라고 말합니다. 다못 얼굴모습만이 아니라 그 취미며 성격도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 외에도 연령이며 학력이며 직업이며 경우 등이 다르고 보면 인생에 대하여 보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의 하고자 하여 구하는 바를 보더라도 농민에 있어서는 전답에서 수확이 많아지기를 구할 것이요, 장사하는 이는 상업에 있어서 매매가 번창하기를 원할 것이요, 청년남녀에 있어서는 청년남녀대로 구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생활태도를 보더라도 일시적인 향락을 가지고 인생의 살아가는 값어치로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재산이며 지위며 명예를 얻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청빈에서 달게 처하여 전 생애를 진리탐구에다 바치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어 가는 학자도 있으며, 침식을 잊고 미술의 창조에다 뼈와 몸을 바쳐 가는 예술가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처자를 놓아두고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여가며 주의에 순직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회의 안녕과 행복을 안목에다 두고 밤낮으로 마음을 궁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다른 것과 같이 그 살아가는 방법이며 목표도 가지가지 여럿입니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사이에서 우리들은 어떠한 생활방법을 가져야만 값어치  있는 생활이 되며 값어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우리들은 진실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인생의 근본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론하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로 보다 보람차고, 보다 행복한 생활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사실이지 사람은 과거 수천 년 동안에 여러 가지 악조건 아래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을 벌여가면서 오늘까지에 여러 가지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곧 정치, 경제, 법률, 교육, 학문, 도덕, 예술 등등 그 문화의 범위는 헤아려 본다면 한이 없습니다.
특히 근대에 있어서 물질문명의 발달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로 편리한 도구를 주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서 사람의 정신생활이 얼마나 풍부해졌으며 인간 자신에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왔을까요. 확실히 물질 방면에서 보면 우리들 생활은 해마다 향상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편리하게 된 일과는 동일하지 않고 차라리 현재의 불안은 날마다 더하여 간다고 하겠습니다.
현대는 우주시대라고 부릅니다. 우리들 머리에는 인공위성이 돌고 돌며, 달나라에 간다, 별나라에 간다 합니다마는, 물질문명의 장족진보가 인류에게 참 행복을 가져왔느냐고 하면 차라리 그와는 반대로 전 인류의 생활을 파멸에다 끌어넣는 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안에 쌓여있습니다.
모든 동물에는 생명을 지속하기 위하여 「食」이라는 본능이 있고 또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하여 「性」이라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도 또한 동물의 일종인 이상 이러한 본능의 제약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러한 동물 공통의 본능 외에 다른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특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안다(知) 생각한다(思) 깨닫는다(覺)는 동물이란 말입니다. 확실히 사람은 「食」과 「性」의 두 가지 본능을 가지고 충동에 움직여가면서도 知, 思, 覺을 일으켜서 자기를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높여가려고 합니다.
개미며 꿀벌들에게는 아무리 놀라운 값어치가 있는 생생의 활동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물의 본능에 지나지 않고 그 활동도 본능의 테두리 이상에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사람의 행동은 자기를 발견하는 내성과 사유와 자각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 속에는 知, 思, 覺이 따르게 되고 그 知, 思, 覺이라는 관문을 통하는데 따라 사람의 행동은 행위로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사람은 知, 思, 覺의 동물이라고 말했지마는 사람은 또한 행위 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행위 한다는 것은 불법으로써 생활을 빛내고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일원의 종지와 삼학팔조와 사은사요 세 가지는 천하 사람이 다 같이 배워 얻어야 할 대도인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삼학팔조에서 얻어진 삼대력인 이치와 사은사요에서 이루어진 보은행인 은혜 곧 理·恩생활을 들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기가 이상을 실현하려고 할 때에 이상과 현실의 모순되는 점을 자기 몸을 가지고 체험할 때에는 무엇인가 모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한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싶다고 원치 않을 수 없을 때 거기에서 理恩생활을 넘는 종교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생활은 어떠한 생활이며, 불법은 어떠한 불법인가를 이와 같이 생각하여본 즉 사람에게는 대체로 세 가지 생활 면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곧 제1에는 충동하는 욕망에 지쳐서 동물의 세계에 내려앉으려고 하는 본능에의 생활 면이고, 제2는 理·恩을 병행하여 현실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려고 하는 理恩에의 생활 면이고, 제3은 이상과 현실의 모순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한 힘에 의지하려고 하는 종교에서의 생활 면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생활 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본능 생활에서 理恩생활로, 理恩생활에서 종교생활로 들어가는 것이 진실한 삶의 방법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종교는 말하자면 자력생활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상제라 하며 조물주라 하는 것은 필경에 가서는 우리들의 정신의 그림자에 지내지 않고, 또한 이 우주와 인생을 떠나서 신이며 불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생각할 때에 불법이라는 것도 인도 이외에는 없다고 보겠고, 극락이라 하며 천국이라 하는 것도 이 세상 밖에는 없다고 보겠습니다.
古德이 말하기를 「우리가 생활해 가는 데서 족한 줄 아는 이는 복의 진리를 안다.」고 이러한 이치에 따라서 많은 사람은 평상심이 이 도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안심입명의 도는 곧 평상심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들은 업무를 잡고 의무를 다하고 인도를 밟아가는 곳에 안심이 있고 극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라 하며 불법이라 하는 것은 결코 평상시에 우리가 실천해 가는 생활과 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끝으로 대종경 인도품 40장을 소개합니다. 「삶의 직업 가운데는 복 짓는 직업도 있고 죄짓는 직업도 있나니 복 짓는 직업은 그 직업을 가짐으로써 모든 사회에 이익이 미쳐가며 나의 마음도 자연 선해지는 직업이요, 죄짓는 직업은 그 직업을 가짐으로써 모든 사회에 해독이 미쳐가며 나의 마음도 자연히 악해지는 직업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직업을 가지는 데에도 반드시 가리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 모든 직업 가운데에 제일 좋은 직업은 일체중생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여 고해에서 낙원으로 제도하는 부처님의 사업이니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필자 약력
1897년 전북 남원 출생
일본대학 법과 졸업
동경제대 사회학과 수학
원광대학 교수
원불교 순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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