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점에 다다른 구미의 종교계
70년대 종교계 주역은 한국
진리의 실현에 앞장서는 노력 절실
세계 대세의 외면은 큰 잘못

이기영
약력
○ 1922.2. 황해도 출생
○ 경성제대 법문학부 2년 루벤대학 대학원 수료
○ 동국대 부교수·동대 대학원 교무과장 문학박사
○ 동국대 불교대 교수 겸 동대 부설 비교사상연구소장
○ 현재 영남대학교 교수
저서: 원효사상 외 논문 다수
변모하는 구미의 종교계
한 시대의 사상은 그 시대의 주요 구성원의 사상이다. 전쟁은 인간의 종교의식을 양양케하는 계기가 되었다. 2차대전으로 인하여 종교의식이 고조된 한 지도적 세대는 그 황혼을 맞이하게 되고, 그들의 지도 밑에서 자라온 다음의 세대가 지금 구미사회의 리더쉽의 바톤을 이어받기 시작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구미사회에서는 의식구조면에서 적지 않은 변모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세대차라는 자연적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나, 물질적 변영이라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그것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구미의 종교계가 전통의 발굴, 계승, 미화란 보수적 종교부흥의 자세로서 점차 독창적인 모색과 시행착오를 수반한 과감한 개척적 자세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종전당시의 30대 40대를 일단으로 하는 리더와 20대 30대 일단으로 하는 젊은 세대간의 리더쉽 교체과정에 들어 난 사실이다.
이 리더쉽의 교체는 반드시 획일적으로 연령에만 구애되지는 않는다. 연로자 사이에도 혁식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연소자 사이에도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고 연소자 사이에도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다. 리더쉽이 교체는 점진적이며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까닭에 표면적 의식구조의 판도가 완전히 변모하는 하나의 시대로 명확한 선을 긋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의 종교계에는 전후 20년을 맞이하여 뚜렷한 판도의 변화가 나타나고야 말았다. 개인주의적 보수적 종교는 이타주의적 종교의 행태로 바뀌어왔다. 내성적 종교가 아니라 활동적 종교가 보다 가치 있는 것이란 표어가 더 많이 공명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1960년까지만 해도 수도원에 들어가 독신을 지키며 일생을 기도로 바치겠다는 청년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65년에는 이미 그 전날의 이상주의자들의 자취를 수도원에서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유럽의 신학교에는 성직자 지망생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프랑스의 대학생들은 공공연히 그들이 이미 낡은 교리를 믿지 않으며,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나 스스로 교인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자기류의 종교관을 피력하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전 세계의 4십만 신부 중 4천여 명이 신부의 지위를 포기하고 결혼하여 평신도로 있기를 로마 교황청에 청원하였다. 알려지지 않는 숫자는 이를 훨씬 넘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는 현실도피의 새로운 무드가 히피들에 의하여 도입 유도되고 있다. 최근에는 4십만의 히피가 환각제를 먹고 남녀가 혼거하며 종교적 엑스타지를 맛보려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1960년대의 종반에 나타난 현실이다.
종교적 리더의 세대교체
1970년대의 리더쉽은 2차 대전 종료 당시의 10대 소년에 의해 장악될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이미 25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사회의 중견일꾼이 되어있다.
그들은 자라면서 비로소 세계가 백인들만으로, 그리고 서양의 기독교 문명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세계에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가 있으며, 기독교의 대적자인 공산주의자가 있으며, 보다 넓은 지역에 아직도 그들과는 엄청나게 가난한 수많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 앞에는 사상적으로 관용적이고 박애적이 될 수 있는 이상주의에의 길이 열려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는 물질문명의 거센 바람 속에서 이는 본능적 향락, 관능주의적 유혹의 하이웨이가 열려있다. 구미의 「스튜던트 파워」란 이러한 20대 청년의 정신적 정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들이 이끌어 갈 1970년대의 종교가 이제까지의 그것과 전연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 및 내용의 것이 될 지는 속단할 수가 없다. 아직도 미래는 하나의 가변적인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정세는 구미이외의 다른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이며, 특히 우리 한국 종교계의 1970년대 전망은 어떠한가? 필자는 먼저 앞서 말한 구미종교계가 처한 지난 25년간의 상황은 우리 한국의 경우 그대로 들어맞지 않으며 한국인의 미래는 그들이 처한 특수성 때문에 적지 않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인이 처한 특수한 사정이란 해방과 더불어 물려받은 다방면의 후진성과 그 극복의 겨를도 없이 겪어야 했던 6·25 동란, 그리고 해방 자체의 의타적 관계 및 그 연장, 게다가 인접국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가 있어서 조성되는 사정이다.
한국의 전후 25년간은 1953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8년간의 공백을 완전히 제거한 17년으로 잡아야한다. 그런데 그 17년도 1960년 4월에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5·16이 일어날 때까지의 정치적 혼란 속의 혼미한 사상계의 현실로 보아 구미가 다행히 경험할 수 있었던 종교적 흥륭의 소지는 마련되지 않았던 사실을 감안하여야 하므로 그 시기는 퍽 단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차 대전과 6·25 동란은 우리에게 종교적 의식을 고조시킬만한 충분한 여건이 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인의 종교의식은 참혹한 현실로부터의 도피, 피안의 복지에로의 환생만을 원하는 처절한 감성을 바탕으로 하였고 현실을 개척하는 내적 힘의 배양을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던 것이 일반적 형세였다.
그것은 기독교나 불교나 마찬가지였다. 5·16 이후 비교적 안정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1961년 이후의 9년간 우리 한국인의 종교의식에도 일부 진보적 종교 사상가들에 의한 구미 풍조의 도입으로 약간의 영향이 미치기는 했으나 그것은 한국인들 자신의 자발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방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계에는 서구인들 간에 있었던 합리적 사고방식도 물질적 번영도 결연된 채 해방 전부터 내려오는 원초적 종교의식이 그냥 그대로 잔존한다.
더욱이 한국의 종교계는 다원적이어서 구미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일원적인 문화적 「Identity」를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정치에 대한 종교의 무력성은 자연히 한국의 종교계를 시대의 리더쉽으로부터 멀리 유리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때때로 특정종교의 신자인 정치 권력자가 나왔어도 국민의 종교의식이 발전되지 못한 사회에 있어서 한 종교인인 정치가는 종교계 자체를 변혁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시급한 젊은 리더의 양성
한국의 전통적 종교들은 아직 그 안에서 이론면의 젊은 리더를 길러내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역사의 흐름 밖에서 공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떠한 형태든지 동적인 의식이 있어야 生·住·異·滅의 서클을 제 나름대로 굴러가겠는데, 그 시작이 없으므로 그 끝이 없으며 그 미래가 전망되지 않고 마는 것이다.
종교계란 역시 어쩔 수 없는 의식의 세계인데 무의식 속에만 잠겨있다는 것은 영겁이ㅡ 해탈이라고 찬양할 수는 있을망정, 역사를 끌고 가 그것을 변혁시키거나 발전시킬 능력은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종교부재의 현상이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식면의 답보상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처한 국제관계의 줄을 타고 도도히 흘러들어 오는 향락적 물질문화의 풍조는 우리의 10대, 20대의 뇌리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한국의 청소년이 모두 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가정 출신이기만 하다면 이 사태는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가정의 생활수준은 현격한 빈부의 격차 속에 있으며 특히 가난과 고생을 아는 많은 시골학생이 아직도 취직 경쟁 속에서 두각을 들어내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나라의 미래를 밝게 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가 없지 않는 것은 그 10대 20대가 만날 수 있는 종교적 리더가 적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아직 타부시 되고 있는 유물사관적 사고방식에 대한 면역이 되어있지 않다는 위구할 만한 사정이 있다. 같은 백인 세계이면서도 파리의 젊은이의 사고방식과 뉴욕의 젊은이의 그것 사이에는 이상주의의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젊은이가 배울 만한 이상주의적 종교의식 형태는 뉴욕이나 동경에서보다도 파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에겐 동경의 「전학련」 뉴욕의 「히피」에게서 더 많은 부정적인 것을 배울 우려가 있는 것이다.
탈피해야 할 답보상태
정체적 비활동성
우리 한국이 처한 모든 후진적 요소는 한국의 종교계를 역시 세계의 선진적 조류에 그냥 휘말리게 하고 말 자연적 여건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세에 주관 없이 흡수되는 사태는 지난날 우리의 기성세대가 세계의 대세를 모르고 안일한 문화의식에 잠겼던 것 못지 않게 유해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후진이니 선진이니 하는 말을 썼지만 그것은 가치로서의 우열을 따지자는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가 선진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거기서 하는 일이 좋다거나 우월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면 우리의 후진성이란 우리의 것이 모두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답보상태, 그 정체성, 그 비활동성 속에 우리의 후진성이 나타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세계의 조류에 견주어 우리의 전통을 재해석하고 오늘의 가난과 고통의 충격을 살려 진리의 실현에 앞장을 서는 의지가 이 한국에서처럼 심각하고 강인하게 나올 수 있는 곳이 또 다시 없다고 느끼고 있다. 70년대의 종교계가 아직도 그 활력을 가지고 성장할 곳은 한국 밖에는 없는 지도 모른다.
분명히 한국에는 그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 자신이 얼마만큼 진지하게 이일을 해내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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