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는 원불교 제2혁신의 대
건교 정신의 재확인 점검시대
실천하는 종교라야 세계의 광명 된다.
새로움 속에서 새로워져야지

한종만
약력
1931. 전남 광주 출생
1956. 원광대학 교학과 졸업
1957. 원불교 대마지부 교무
1960. 원불교 동산선원 교무
현재. 원광대학 교수
저서: 불교개론, 정전해의
「日日新 又日新」(날로 날로 새로워가고 또 한 번 다시 새로워지자.)
어느 어진 임금이 날마다 틀 없이 쓰는 「세숫대야」에 새겨놓고 자신을 살펴 깨우치던 글이다. 뼈가 저리고 눈물겹도록 좋은 선인의 생활모습이다.
원불교는 이미 50여년 전에 종교 혁신의 횃불을 들고 새로운 종교로서 이 세계, 이 사회, 이 나라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바로 종교의 시대화, 종교의 생활화, 종교의 대중화였다.
종교가 그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하여 그 시대의 길잡이가 되고, 종교가 그 사회생활에 파고들어 생활하면서 수도할 수 있게 하고, 종교가 그 대중과 자리를 같이하여 누구나가 다 같이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
70년대는 원불교의 반백년 대이다. 새벽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우리는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과연 얼마만큼 대종사님이 주창했던 종교혁신 운동이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물론 5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아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잘 해 나온 면은 더욱 살려서 적극적으로 촉진하고 미비한 점은 보충해서 살려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원불교의 70년대는 제2단계의 혁신 곧 제2혁신의 대라고 본다.
「日日新 又日新」낡은 것에서 새로워지는 것도 대견하지만 새로움 속에서 더욱 새로워  짐은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애써서 따라가는 거북이도 장하지만 잘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토끼가 게으름만 부리지 않는다면 비단 위에 꽃무늬를 놓음이 되지 않는가.
이미 남 먼저 새로워졌으니 더욱 새로워져야 되지 않겠는가.
종법사님은 반백년 대의 전환기를 「거듭나는 기간으로」정하자고 하시었다.
개인의 인격도 다시 새로워져야 하고 또한 교단의 생각도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도 해본다.
이러한 뜻에서 원불교의 기본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미비한 점을 보충해보려는 점을 몇 가지로 생각해본다.
긴장정신의 재확인
대종사님은 이미 50여 년 전에 이 시대의 위기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준 것과 같은 시대」라고 하시었다.
정신의 힘을 잃고 물욕에만 끌려 다니는 현대인의 처참한 모습, 내일의 불행을 예측할 길 없이 무기를 든 도둑과 같이 이기주의에 허덕이는 모습, 자기 잘못은 전연 아랑곳없이 원망하고 미워만 하는 인간관계.
이러한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대종사님은 감연히 긴장에서 일어섰다.
위기는 안이한 방광에서는 구원되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이 위기의 구원에 총동원되고  다.
과연 우리는 이 구출 작업에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오히려 이 작업은 이제부터 우리가 아니 모든 종교인이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다.
구출 작업의 방법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아폴로」를 타고 달에 가는 사람에게는 달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50여 년 전에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난리에 깜짝 놀라 잠 못 이루고 걱정하시던 대종사님의 긴장 정신이 다시 한 번 일깨워져야겠다.
차가워져서 꽁꽁 얼어붙은 손발을 더운물에 녹이는 것보다 다시 한 번 찬물에 집어 넣어봄도 의의 있는 일일 것이다.
탈피정신의 재확인
지저분하고 묵은 껍질을 벗어버릴 때처럼 시원스러운 때는 없을 것이다. 대종사께서 제시했던 탈피정신을 재확인해보자.
진리성과 사실성에 근거한 교리의 구현은 어떻게 되었는가.
보다 더 사실에 맞고 시대에 맞는 교리의 해석과 강조가 필요하다. 또는 보다 더 현실적인 신앙의 방향과 수행의 태도가 모색되어야 한다.
컴퓨터가 권투 심판을 맡기 시작했다.
시대성과 실질성에 근거한 예법의 실현은 어떻게 되었는가.
원불교 예법의 특징은 사회생활에의 적응에 있다. 능히 생활 속에서 간소하게 실천할 수 있으면서 그 예법을 통해 현실 생활에 진리성을 부여하고 생활을 신성화시키는 데 있다.
보다 더 실질적인 간소한 예법의 실천을 통해 현대인에게 뼈아픈 각성과 실감을 주어야겠다.
평등성과 민주성에 근거한 제도의 조직은 어떻게 되었는가?
모든 제도의 조직과 실천이 보다 더 폭넓고 참신해야 되겠다.
이미 50여 년 전에 이 시대보다 크게 앞서간 대종사님의 뜻에 뒤져서는 안 되겠다. 모든 사업 계획이 폭넓고 적극적이어야 되겠으며 모든 사무 추진이 정확하면서도 신속하여야 되겠다.
교화 양식도 보다 더 참신해야 되겠다. 법당에서의 교화보다도 실질적으로 가정이나 직장에 파고들어야 하겠으며, 법회 진행도 간소하고 신속하게 해야 되겠다. 신속한 그 속에서 엄숙성을 더욱 들어 나게 하고 간단한 설교 속에서 뼈아픈 감명을 넣어줘야겠다.
생활양식도 보다 더 참신해야 되겠다. 종교적인 엄숙성과 검박성을 주체로 하면서도 먹고 입고 사는 생활양식이 보다 더 시대에 맞고 편리하게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원불교의 특징을 어느 면에서 보면 건전한 수도와 생활을 아울러 하게 하는데 있다. 모든 능력이 사회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어디엔가 안으로 깊이 쌓여 가는 모습이 건전한 종교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활동정신의 재확인
불이 났을 때 이성을 잃고 허둥지둥 뛰어만 다녀도 안 되지만 그 반면 너무나 태연하게 훨훨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도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올바른 수양일까?
원불교 수행의 특징은 일이 없을 때는 그 여가를 수행으로 선용하여 수행의 힘을 쌓아가는 것이지만, 일단 일을 당하면 그 일에 적극적으로 적응해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활동적이고 산 공부에 그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종교의 역할을 어느 면에서 보면 사회 활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심령의 구제 만에도 종교적 역할의 일면성은 있겠지만 오늘의 종교 또는 미래의 종교는 사회 발전에 직접 공헌하는 활동적 종교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사회에 있어 원불교에 대한 기대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활동하면서 안으로 힘을 깊이 쌓아가며 밖으로 그 일 그 일을 올바르게 잘 처리해나가는 산 인격의 수련을 더욱 더 살려야겠다.
교화에 있어서도 보다 더 활동적인 교화이어야겠다. 청소년의 기질을 면밀히 검토하여 그 시대감각에 적응해서 교화하여야겠다.
의식 포교도 중요하지만 인격수련의 포교는 그 보다 더 중요하다.
이제까지의 원불교의 포교와 사업은 내실 위주였다고 본다. 안으로 튼튼하게 쌓아올린 그 바탕에는 밖으로 활발하게 뻗쳐 나가는 길이 있어야 한다.
유능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양성하여 세계 포교에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할 것이다.
사업에 있어서도 건실하면서도 좀 더 폭을 넓혀 주요 도시에 교육 사업을 더욱 더 확창 하고 건전한 사업시설도 확충해서 생산성에 의한 교단의 건전한 운영이라는 기본 정신을 더욱 더 되살려야 할 것이다.
봉공정신의 재확인
도시에나 산간에나 농촌에 우뚝 서있는 여러 종교 단체의 성당이나 교회당이나 사원이나 교당을 바라볼 때마다 한 종교인으로서 생각되는 바가 있다.
과연 종교가 이 사회와 이 인류를 위하여 얼마만큼 희생적으로 봉공하였는가를 생각해 본다.
고민하는 사람에게 마음 조금 위로해주고 불륜한 사람에게 도덕의 길 조금 바로잡아주고 불우한 사람에게 자선의 손길 좀 뻗쳐주었다고 해서 종교가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종교는 종교 단체 자체로서 필요한 거시 아니라 그 종교의 역할이 그 사회 발전과 인류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할 때에 필요한 것이다.
대종사님은 철두철미 이 세계 이 사회에 대한 봉공정신에서 교단을 창설했다. 원불교의 역사적 사명은 어느 의미에서 보면 이 사회에 대한 봉공정신에 있다고 본다.
내 교단 내 기관의 성장이 큰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는 일이 이 사회와 이 인류에게 크게 유익을 주느냐가 큰 문제이다.
원불교의 교역자를 「전무출신」이라고 부른다. 「다 바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금강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백번 읽어보아도 두 가지 의미로 요약된다. 하나는 「법력을 쌓았다는 흔적을 남기지 마라」 또 하나는 「공로를 이루었다는 마음을 두지 마라」라고 생각된다.
어느 정도 법력을 쌓아 지도자의 권위로서 중생을 내려다보아도 안 될 것이며 또는 종교인으로서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는 생각마저도 놓아야 할 것이다.
원불교의 교단 운영의 방향이나 교역자의 정신 자세는 철두철미 대종사님의 봉공정신에 바탕 하여 이 세상에 「소금」이 되는 기본 정신을 더욱 더 되살려야 할 것이다.
실천정신의 재확인
원불교의 생명이 마지막으로 크게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실천의 정신이다.
종법사님은 「실천의 종교라야 세계의 광명이 된다.」고 하시었다.
도덕적 인격과 능력적 인격의 양면을 원만하게 갖추는 것도 남모르게 적공 드려 쌓는 실천에서 온 것이요,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생활로써 평화세계를 건설하는 것도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미움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교리도 좋고 제도도 좋다. 또는 이 세계 이 사회에서의 기대도 크다.
오직 남아있는 한 문제는 대종사님의 뜻에 어김이 없이 말에 앞서 목적에 앞서 앞으로의 세계를 폭넓게 바라보며 뚜벅뚜벅 밖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안으로 세상을 품안에 안고 「바치는 마음」으로 몸소 실천하는 일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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