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뜻은 잘 계승 발전되고 있는가.

원기 63년의 새해가 밝았다. 2대 2회 기념총회를 지낸 교단은 이제 다시 2대말(원기 72년) 개교 1백 년대를 향해 힘찬 전진을 거듭해야겠다.
그동안 60여 년의 교단사를 통하여 우리는 안으로 힘을 길러왔고, 교화· 교육· 자선· 산업· 훈련 등의 각종 기관을 확장해왔고 교헌개정으로 체제를 정비해 왔다.
이제 교단은 그 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교조 소태산 대종사의 큰 뜻을 널리 펴야할 시기에 이르른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땅을 선택하였다. 민심은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가는 주권을 상실해 버린 이 땅에서 원불교를 창립해서 만생령을 구제하려 한 것이다.
60여 년의 세월, 교단은 온갖 난관을 이룩해왔다. 외형적인 발전에 비례할 만큼 대종사의 뜻도 잘 실현되어왔던가? 우리는 엄숙한 자세로 이러한 물음에 응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대종사가 가졌던 포용력과 조화력, 개혁과 창조의 의지를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금 확인하고 다짐해야겠다.
대해장강이 청탁을 병용하고도 아무런 말없이 유유히 흘러가듯 성현은 큰 포용력으로 한 중생도 버리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리 각양각색의 인간이 있다 할지라도 성현의 대자대비(大慈大悲)심은 모두 다 감싸주는 것이다. 용납 못할 사람, 이해 못할 일이 있다면 이미 성현의 정신은 아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기쁜 일 슬픈 일, 그 모두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용할 때 세상은 한 집안이요 전 인류는 한 가족이 된다.
가깝게는 내 이웃 내 동지부터, 교단의 모든 기관과 기관, 선후진과 재가· 출가가 모두 포용력을 가질 때, 교단은 균형 있는 발전을 가져오고 대중은 화합 단결할 수 있는 것이다. 포용력이 없으면 개인과 개인끼리는 서로 알력과 시기질투요, 기관과 기관 사이에는 분열과 대립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또 종교가 무한한 포용력을 가져야만 사회의 고민을 함께 아파하며 만생령을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비심도 우러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포용력은 타종교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교세가 발전함에 따라 타종교의 도전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적 관계를 넘어서서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조화는 극치의 예술이다. 모든 이질적 관계를 잘 조화해야만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너와 나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조화, 이상과 현실의 조화, 이 모든 조화에서 평화와 전진이 있는 것이다.
대종사는 조화의 예술가였다. 신앙과 수행의 조화, 삼학의 조화 있는 인격, 이론과 실제의 조화, 과거 현재 미래의 조화, 정신과 육신의 조화, 종교와 종교의 조화, 이 모든 조화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즉 묘용의 조화를 자유자래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원불교는 포용의 종교요, 원불교적 인간상은 조화적 인간인 것이다. 아무리 상이한 경계와 부딪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조화의 예술이 피어나야 하는 것이다.
조화는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만든다. 마치 동서 문화의 조화가 세계 문화를 만들듯이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란 말은 조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진리, 자연환경이 다르고 민족과 국가가 다른 세계가 하나로 되는 길 그것은 오직 조화의 예술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단은 과연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가. 아직도 남아있는 가족주의적 사고방식, 사회의 변화에 발을 맞추기라도 하는 듯한 양극화 현상, 갈수록 깊어져가는 가치관의 격리현상, 소위 전체공심과 부분공심과의 고민, 이러한 사실들은 조화를 더욱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는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다. 쉴 새 없는 개혁의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퇴보하거나 부패하고 만다. 마치 흐르지 않는 강물은 썩듯이.
항상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하는 개혁은 인간사회의 필수조건이다. 아무리 좋은 사회도 개혁이 뒤따르지 않으면 썩고 만다. 개혁하고, 개혁하고 또 개혁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종사는 개혁의 불꽃이었다. 당시의 풍속을 과감히 개혁했고 미신을 타파했다. 의식 구조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고 무력한 종교를 참신하게 개혁했다. 대종사의 생애는 사회개혁가의 일생이었고 종교혁명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불교는 오늘날 사회의 기대와 요청을 받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처럼 짧은 시일에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개혁정신에 있는 것이다. 당시의 민중들에게 환영을 받고, 한국 사회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개혁의 정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초창 당시의 그 개혁의 불꽃이 오늘날은 자꾸 껴져가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교단 구석구석에 개혁해야겠다는 여론이 높아져가고 있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넘겨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개혁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사이이다. 과감만 개혁은 새로운 창조를 낳는다. 창조는 무사안일이나 모방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뼈저린 아픔을 수반한 개혁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시작해서 하루 저녁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죽어가도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예술가도 하루아침에 탄생하는 것도 아니요, 종교적 성자도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민생의 도탄이 성자를 낳고 성자는 다시 새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포용과 조화, 개혁의 의지로서 새 세계를 창조하였다.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포용력, 어떠한 이질적인 것과도 하나가 되는 조화의 예술, 끊임없이 개혁해가는 불굴의 의지에서 일원의 광명이 찬란한 새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원기 63년의 새 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포용과 조화, 개혁과 창조의 의지를 불태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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