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사상의 전개
실학은 농본 경제를 기본으로 한
경국제민의 구체적 사회 정책

실학이란 말의 원뜻은 유학 본래의 정신에 충실하여 수기치인의 실(實)을 위한 학문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 해석이 구구하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실학이란 임진왜란 이후에 싹이 터서 영조, 정조 때에 전성을 이룬 학술사상이 한 경향을 말한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사회는 경제적인 질서가 붕괴됨으로써 사회체제 전반에 침체를 가져왔고 여기에다 병자호란을 당하고 나서는 더욱 경제적 질서는 혼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파벌의 대립이 고질화되어 권력투쟁의 갈등으로 사림계층의 상당한 영역이 권력에서 소외당하고 몰락하며, 수수의 권력전횡이 정치 풍토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투쟁과정에서 성리설이나 예학이 정치적 대립에 이용되기 시작하자. 성리설의 주장은 맹목적으로 입장을 고수하는 경향에 따라 학문적 정신을 타락시키고, 예론의 성행은 사회의 분열을 더욱 촉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적 조류로서 16, 17세기의 근세적 움직임은 외면하였을 때 전통적 명분론이 실리와 유리되기 쉬웠고 신분제도의 엄격화나 사상적 권위주의는 사회의 유기적인 생동과 발전을 촉진하는 사상의 자유로운 퐁토를 억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상계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그 내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무엇보다 정치세력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은 사회현실의 저변에 높여있는 문제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구국(救國) 구폐(救弊)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때마침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수신· 제가· 치국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고증학과 천문· 지리· 역산· 농학· 의학 등의 놀라운 과학적 지식을 비롯하여 새로운 세계관· 인생관을 제공해주는 서학과 청조의 찬란한 문화와 산업제도를 그대로 배울 것을 주장하는 북학파가 서로 합치되어 일종의 경세지학으로 발전되었는데 최근에 와서 이들의 학문의 경향을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한국의 실학의 내용은 다양하나 이 학풍의 정신상의 공통점은 비판정신· 실증정신· 실용정신이다.
실학파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서, 실학사상은 이미 주자학파에서 확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조선 후기 실학파의 발생과 전개과정에서, 실학사상은 이미 주자학파에서 확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영역을 개척한 사람은 반계 유형원(1622~ 1673)이다. 정인보는 창원국학산고에서 「조선 근대의 학술사를 종계(宗系)하여 보면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二祖)요, 다산이 삼조(三祖)」라 하고 있다. 반계 유형원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세밀히 분석 검토한 후에 민생고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토지제도의 개혁과 인재의 적절한 등용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의 방법론 즉 전제로서는 균제법을 내용으로 하는 과전제의 채택을 주장하였다. 그는 군포법의 폐지와 아울러 공물법 환상법 내유사 등의 폐지, 국왕의 봉록제의 왕실 예찬의 확립 일반 상공업자의 자유 발전의 조장, 교육, 선거에 이르는 실로 거대한 개혁체계를 안출하였던 것이다. 반계류의 실학은 농본 경계를 기본으로 한 제반 사회 정책의 확립을 최후의 목표로 하는 경국제민의 구제적 사회정책이었다. 반계의 실학체계는 이익, 홍대용(1731~ 1783), 정약용(1762~ 1836) 등에게 계승 발전되었으나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 영조의 땅으로 반계수록이 간행되었을 뿐이다.
성호 이익(1681~ 1763)은 처음 성리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츰 당시의 사회현실에 관심을 도려, 이이· 유형원의 학문에 심취,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지리에서부터 율산· 의약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저인 성호사설과 괵우록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전제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田主)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에서 찾았으며,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제한된 일정한 직제에 비해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많은 관리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당쟁을 조성하는 것이라 하여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을 주장했고, 인재등용에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貢擧)제를 아울러 실시할 것 등을 제시했지만 당시의 정치 여건으로는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많은 후학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었는데 역사학에 안종복(1712~ 1791), 지리학에 윤동규(1695~ 1773), 이중환(1690~ 1760), 경학에 이병휴, 수학에 이가환(1742~ 1801) 등이 유명하였고, 또 이익의 학문은 박지원(1737~ 1805), 박제가(1750~ ?), 정약용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스스로 자기의 학을 육경사서이지수기(六經四書以之修己) 일표이서이지치평의(一表二書以之治平矣)라고 하여 육경사서 곧 경학과 일표이서 곧 경세학으로 양분하여 경학과 경세학은 표리를 이룬다고 하여 그는 「공자지도(孔子之道)는 수기치인이이(修己治人而已)」라고 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을 대략 살펴보면 그는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 경세· 목민 등에 두고, 공맹(孔孟)의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 거기서 재출발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을 강조, 주자의 천리설과 이기설을 부정, 성기호설을 주장하였으며, 또 유형원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하고,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 도입론을 과감히 받아드렸으니 그를 흔히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하고 있다.
전기된 인명 외에도 유몽인(1559~ 1623), 이수광(1563~ 1628), 허균(1569~ 1618), 박세당(1629~ 1703), 홍만선(1643~ 1715), 정상기(1678~ 1752), 신경준(1712~ 1781), 황윤석(1729~ 1791), 이긍익(1736~ 1806), 권일신(1736~ 1801), 이덕무(1741~ 1793), 유득공(1749~ ?), 이벽(1754~ 1786), 이승훈(1756~ 1801), 정약전(1758~ 1816), 정약종(1760~ 1801), 성해응(1760~ 1839), 서유구(1764~ 1845), 유희(1773~ 1837), 김정희(1786~ 1856), 이규경(1788~ ?), 김정호(?~ 1864), 최한기(1803~ 1879) 등의 실학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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