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개교절 기념 토론-

◇… 전쟁의 먹구름이 걷히지 않을 때 명장이 출세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름난 충신이 등장한다. 세상이 혼란하고 윤리 도덕이 타락할 때 구세성자가 출현하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성자라 하나 윤리도덕이 바로 선 시대에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
참석자
손정윤(본사 주필)
김성철(본사 논설위원)
하일성(본사 논설위원)
때: 3월 27일
곳: 원광대 출판국
<사진설명: 손정윤 김성철 하일성>
1백만 교도 성미(誠米)운동으로 삼일운동 자금확보
1914년 4월에 「공동 전수 심법식」거행- 천도교
의료사업·교육사업·농촌근대화·사회악 정화
계급타파·여성지위 향상·근로정신 앙양에 공헌- 기독교
농산조합·근검저축조합·간석지개간 등은 1910년대부터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분리를 주장…… 불교유신운동
3·1 운동 이후 농촌계몽운동, 형평운동 등 전개
소태산 대종사의 탄생과 원불교의 출현은 당시의 시대상이 매우 혼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절망과 극한상황에 부딪칠 때 절대자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다. 원불교가 출현할 당시, 한국의 종교계는 어떠한 개현운동을 전개했으며, 또한 사회의 혁신운동은 어떠했던가?
불교 개혁운동
1911년 6월 총독부에서 사찰령을 공포한 이후 불교계는 차츰 친일적인 색채가 짙어갔다. 이에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젊은 불교인들은 불교의 타락상을 통탄하고 과감한 개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교유신운동이다.
한용운은 불교의 유신은 파괴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승려의 교육문제, 참석문제, 포교문제, 참선문제, 포교문제, 사찰의 위치와 의식문제, 승려의 자활노동의 문제, 승려의 결혼문제, 염불당 폐지문제 등 광범위한 혁신론을 주장하였다.
1914년 11월 25일에는 서울에서 불교 진흥회가 설립되었다. 30 본산의 주지들이 그 발기인이 되었고 역사가 장지연 이능화 등도 참여하였다. 이 해에 전국에서 7천여 명의 승려들과 수많은 신도들이 의연금품을 모아 서울 수송동에 있는 각황사를 개축했다. 1915년 7월 3일에 불교진흥회는 장충단에서 무차(無遮)대회를 열고 이씨 조선 5백년 이래 죄 없이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행사를 열었다.
불교진흥운동의 괄목할 만한 움직임은 불교잡지의 발간과 교육기관의 설립이었다. 1912년 2월에 「조선불교월보」가 창간되어 19호까지 계속되었다. 1913년 11월에는 「해동불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시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 월보」가 나왔고 계속 「조선불교계」「조선불교총부」란 이름으로 계승되었다.
불교진흥회 규칙 제2조에 「사리를 쌍융하고 도속(道俗)이 일치하여 불교를 진흥할 방법을 연구 실행케 함」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진흥회는 포교사 양성소를 설립하고, 포교서를 편찬 간행하며, 명진 학교, 불교중앙학림 등을 설립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불교청년회가 창립되었고, 다시 1921년 12월에는 한용운의 지도로 불교 유신회는 불교혁신의 기치 아래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政敎)분리(총독정치가 불교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를 주장하였다.
1922년 3월에는 유신회의 젊은 승려 1백여 명이 당시 가장 친일 관권주지로 알려졌던 용주사 주지 강대련을 성토하고, 「불교계 대악마 강대련 호고 축출」이란 깃발을 들고 강대련의 등에 북을 지운 후 남대문에서 종로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 사건의 주동자 강신창 김상호 정맹일 등은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계는 자체 개혁과 민족운동을 열렬히 전개했으나, 총독 정치의 탄압과 다수의 친일 승려들 때문에 다분히 일본 불교의 모방으로 흘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도교 혁신운동
1860년 4월 5일 최수운은 후천개벽의 새 조교인 동학 즉 천도의 새 진리를 깨쳤다.
최수운, 최해월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선포하였다.
최수운의 동학사상은 한국 안민· 광제창생의 현실적 호국신앙이었다. 또 후천개벽의 혁신을 강조하고, 동귀일체의 사해 동포 사상을 주장하여 널리 서민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최시형은 최수운이 처형되자 은밀히 방방곡곡을 돌아다녀 「최 보따리」란 별명가지 들으며 포교하였다. 그는 경천 경인 경물의 물물천 사사천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손병희는 1903년 8월에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정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보냈는데 이가 곧 그의 삼전론이다. 삼전론의 내용을 보면 「현재 시급히 힘쓸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전(경제개혁)이요, 둘째는 도전(道戰)(사상· 종교의 주체 확립)이며, 셋째는 언전(言戰)(외교· 언론의 발전)이다.」
1904년에는 갑신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민족의 자각, 생활의 개화와 혁신을 주장한 것으로 손병희의 지시에 의해 20여 만 명이 참가했다. 특히 이 해 9월 30일에 전국에서 일제히 전개한 단발 흑의 운동에는 16만 명이 대거 참여하여 천도교의 단결력을 과시했다.
1916년부터 천도교는 근대화운동(보국안민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천도교의 근대화 운동은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니 인재양성· 교인의 교육훈련· 운동자금 축적이 그것이다.
인재양성우동은 보성소학교, 보성중학교, 보성법률상업학교 등을 인수 경영했고, 동덕여학교를 설립했다.
교인의 교육훈련은 1908년에는 제1차 1912년에는 제2차 교리강습소를 열었다. 또한 교리를 점차 합리화 시키고 민속 신앙적 요소를 제거해갔다. 종지를 「인내천」으로, 표어를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건설」로 확정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1914년 4월에 손병희는 고위 간부 74인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동 전수심 법식」을 거행했다. 이는 과거 1세· 2세 교주는 단전 밀부의 방식으로 법을 전했으나, 전 교도에게 공동전수하는 과감한 대중화의 길로 나선 것이다.
운동자금 축적이란 곧 성미(誠米) 운동을 말한다. 1907년 4월 익산의 오지영이 교인은 식사 때마다 쌀 한 숟갈씩 거두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를 성미라 하는데 전국의 1백만 교인이 참여하여 1백 만 원의 거금이 모여 3· 1 운동의 자금이 되었다.
1919년에는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가 조직되고 이듬해에는 천도교 청년회로 개칭되었다. 1920년 9월에는 언론기관인 개황사가 설립되고 「개벽」「신여성」「어린이」등의 월간지를 발간했다.
1922년 천도교 소년회에서는 김기전과 방정환의 주동으로 5월의 첫 일요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였다. 이가 곧 어린이날의 시초이다.
1923년 9월에는 천도교 청년당은 후천개벽 즉 지상천국건설을 목표로 해서 정신개벽, 인간개벽, 사회개벽의 3대 개벽을 주장하였다.
청년당은 「개벽」「신여성」「어린이」이외에도 「학생」「농민」「부인」「신경제」「농민생활」「혜성」「별건곤」「제일선」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정신계몽에 앞장섰다.
기독교의 토착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맨 처음 들어온 것은 1627년 네덜란드인 박연 일행 세 사람이 표류하여 영주한 것이 그 효시이다. 또 1653년의 네덜란드 상인 하멜 일행 36명도 기독교도였다. 이후로 천주교와 함께 계속 박해를 받다가 1876년에 김진기 이성하 백흥준 이응찬 등 네 청년이 영국 스코틀랜드 교회의 존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씨왕조는 문호 개방 이후에도 척사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1883년 한영 수호조약 이후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허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에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레이, 1885년 4월 5일에는 미국 북장로교 목회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 목회선교사 아펜젤러가, 같은 해 5월 1일에는 미국 북감리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튼과 그의 모친 스크랜튼 부인 등이 서울에 들어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배재학당 이화학당 세브란스 병원 연희전문 등 수많은 학교와 병원이 이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전국의 기독교계 학교는 8백 23개교나 되었다.
1896년 7월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에 의해 독립협회가 결성되었고, 이보다 앞서 4월 7일에는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1907년 1월에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이 함께 모인 대사경회(오늘날의 부흥회)가 열렸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기독교의 교세는 급속히 팽창해갔고 토착화의 기반을 다져갔다. 이는 이 당시의 기독교가 교육사업 의료사업 사회사업의 활발한 전개와 농촌 근대화운동· 사회악 정화 운동· 계급타파· 여성의 지위향상· 근로정신 앙양· 혼상례의 간소화· 민족주의 사상 고취 등에 상당한 업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불교와 천도교와 기독교는 3· 1 운동 때는 서로 대동단결하여 3· 1 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이후 계속하여 민족운동과 사회개조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천주교는 신해사옥 기해사옥 그리고 1866년 3월부터 7년간 계속된 대원군의 대탄압 때에는 2만 5천여 명의 신도 중에서 1만여 명이 순교하는 큰 희생을 치뤘으나 1881년부터는 박해가 해제되고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건립되기까지에 이르렀다.
저축조합 운동과 간석지 개간사업
오늘날의 계나 조합 같은 형식의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일찍이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근대적인 형태의 계나 조합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전국에 일제히 실시되었던 지방 금융조합 운동으로 보여진다.
농민권익옹호, 생산 장려, 농산물 공동판매를 목적으로 한 조합이 1907년에는 10개, 1913년에는 2백 9개에 이르렀고, 이후로 전국에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금융조합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인들의 지도로 조직 운영되었다. 이외에도 민간단체나 종교단체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조합을 설립 운영했던 것으로 보이다. 즉 농산조합· 근검저축조합· 저축계· 부업계 등이 전국에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간석지 개간 사업은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조사 사업 및 일제의 식량증산 운동과 발맞추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토지조사 사업으로 한국민의 농토를 대부분 빼앗아 버려 한국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멀리 만주 시베리아에까지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독부는 또 일본 본토인들을 불러들여 농토 확장을 위한 각종 개간사업의 특권을 주었고, 1910년대부터 이들 일본인들에 의해 황무지, 목포지, 원야지, 간석지 등의 개간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1년에는 80건에 6천 9백 여 정보, 1919년까지에는 전국에 4만 6천여 정보의 간사지가 개간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땅은 미개척의 보고로 보였던 것 같다. 이에 한국인들도 독자적인 개간사업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여권 및 문화운동
1894년 갑오경장 때 여성의 조혼 금지와 과부의 재혼이 허용되었다. 독립신문 제1권 7호의 논설에서 남존여비사상을 통렬히 비난하면서부터 여권운동은 불붙기 시작했다. 이들 여성들은 여권향상 뿐만 아니라 애국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즉 1907년에는 국채보상부인회, 감선회· 탈환회 등이 조직되어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고 안간 힘을 다했다.
1913년 9월에는 평양 숭의 여학교에서 송죽회, 1919년 10월에는 정신(貞信) 여학교에서 대한애국부인회, 1923년 6월에는 YWCA, 1927년 5월에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등이 결성되어 여권향상과 애국운동에 적극 노력했던 것이다.
3· 1 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은 무력투쟁에서 문화운동으로 바뀌었다. 즉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형평운동이 그것이다.
물산장려운동이란 「내 살림 내 것으로」란 표어 아래 국산품 애용운동, 민족의 경제적 자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농촌계몽운동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농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걸고 민중을 계몽하고, 서구 지식을 배우려는 교육의 보급이 그것이다.
형평운동이란 전근대적 폐습을 타파하는 반봉건운동, 계급타파운동이 그것이다.
이처럼 원불교가 출현할 당시의 종교계는 자체 개혁과 사회 개조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사회 각 분야에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려는 각종 혁신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위헤서 원불교는 출현하여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 아래 종교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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