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의 나날
술과 담배는 생활의 일부
한 여인과의 운명적 만남 가져

국민학교 시절 6년동안 개근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열심이었다. 그 이면에는 아버지의 정성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어던 일이 있더라도 학교에 결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평소 강조하셨다. 심지어 내가 다리가 아팠을 때 업어서 학교에 등교 시켰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내 생활에 변화가 왔다. 중학교에 원서를 내 놓은 상태에서 아버님이 심하게 아프셨다. 어렵게 마련한 중학교 입학금도 아버지의 병원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중학교 갈 일이 막막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숫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무료로 공부 시켜준다는 구세군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교는 당시 월영동에 있었는데 공부할 시기를 놓친 사람은 물론이고 고아원에서도 이 학교를 많이 다녔다. 그러나 보니 주위에 어울리는 친구들중에 불량학생들이 많았고, 자연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당시는 그들과 어울려 도시락 먹는 재미로 하교에 다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때는 철로위에 도시락을 놓아두고 기차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면 도시락이 망가지는 쾌감도 있었고 다시 새 도시락을 마련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술 담배를 하기 시작했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어머니가 학교에 빌다시피 하여 어렵게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사회로 뛰어 들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마산 창원간을 운행하는 마이크로버스 조수생활에서도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되었다. 운전면허를 취득했지만 바로 운전을 할 수 없이 다시 정비 공자에 취직을 했다. 여기서도 시련은 매일반이었다. 먼저 입사한 선배가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구타를 일삼았다. 기술을 배우려면 맞고 배워야 오래 남는다는 것이 이제까지 내려온 관행인 셈이었다. 여기서 1년을 견디다 다시 마이크로 버스조수로 가게 되었고 운전을 더 배우기 위해 충무에 있는 아이스크림 대리점 운전기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고행에 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고향인 마산에 돌아왔지만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다. 이일 저일에 조금씩 손을 대어 보았지만 여의치 않아 마산택시회사의 운전기사로 입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생활도 술로 인해 성실히 수행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술과 담배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이 때문에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하게 했다. 거쳐온 직장만도 금성교통, 삼화택시, 신일교통, 매일교통등 인데 그 뒤에 입사한 직장도 술로 인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마다 내일은 어떤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작심 3일이 었다. 그럴수록 술 마시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 고통도 잠시뿐이었다. 주위에 술을 먹는 선배들이 많았고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마냥 술 마시고 돈 쓰는 재미로 산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운전을 하고 받은 돈은 슬값하기에도 부족했기에 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하는 망나니중의 망나니였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운전기사와 손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운전을 하고 가면서 그 여인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릴쯤해서 「내일 만날 수 있느냐」고 말을 건냈다. 손님은 장난말 같아 선지 그냥 앉아 있었다.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내 말에 손님은 오기가 발동했는가 보다. 『사람을 그렇게 못 믿으면 되느냐』며 자기 지갑을 주고 내리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그 여인의 친구 자취집에서 두 번째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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