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심했던 결혼식
리드 : 내습관과 행동에 실망한 아내
어머니 열바에도 장례비용 걱정

당시 그 여인은 마산 자유수출 지역에 다니고있으면서 결혼한 언니집에서 더부살이로 살고 있었다.
쉬운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만 6개월의 교제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여인이 나줄 결혼하여 나의 아내가 된 정공은 교도다. 어느날 아내가 될 그 여인은 언니를 따라 부산에 가게 되었다. 형부가 삼랑진 국민학교에서 근무하다 부산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나는 부산에 가서 그 여인의 언니를 만나 보았다.
나중 아내에서 들으니 「이런 상황에서 운전사와 결혼하면 그쪽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어떻게 결혼할 수 있느냐. 너는 부산에 있고 석윤씨는 마산에 있으니 안 만나면 되지 않느냐」며 언니가 말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도 이 말을 듣고 난감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언니에게 숨김없이 말한 것 중 직업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언니는 나중 『집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네 장래는 네가 책임을 지라』는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장차 장인될 어른이 열반에 들게 되었다. 아내는 그동안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옷 가지만 챙겨 들고 나를 따라 나섰다.
창원 집에서는 아무 여자라도 들어와 살기만 하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나의 망나니 같은 행동에 집안 식구들이 지칠대로 지쳤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고 어머니의 건강의 좋지 못하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동거가 시작되면서 아내는 친정 오빠에게 2~3차례 편지를 썼다. 여기서 계속 살테니까 결혼식을 올려 주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살게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당시 어머니는 창원 4거리에서 호떡을 구워 팔았고 아내도 어머니를 도와 생활했다. 실로 그날 팔아 그날 생활하는 실정인데도 나는 계속해서 술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파티마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 술 버릇은 여전했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 대신 도너스와 호떡을팔아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그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어머니는 그 뒤 2년 동안이나 식물인간으로 계셨다. 동창으로 살이 썩고 나중에는 뼈가 썩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장모님과 처남이 창원에 내려왔다. 처남은 아내에게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시계, 양복, 이불 등을 준비하라며 약간의 돈을 주고 갔다. 드디어 창원교당에서 김도광 교도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아내는 결혼하여 살면서 내 습관과 행동에 많은 실망을 했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저 사람은 누구와 같이 살겠는가」는 생각으로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사랑으로 버티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결혼식을 올린지 한달 만에 오랜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김유숙)께서 열반하셨다.
어머니께서 열반에 드셨지만 장남으로서 주색남유를 하다보니 장례비가 걱정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여동생인 인복이가 모든 장례비용은 자기가 책임지겠으니 원불교 식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겉으로 싫은 표정은 하지 않았지만 구세군 고등공민학교에서 받은 영향 때문인지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는 확실히 몰랐으나 언젠가는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참회하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여동생이 원불교 학생회에 다니는 것조차 반대하던 내가 아닌가.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여동생의 제안에 따라 창원교당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교도ㆍ창원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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