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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慈善과 의무
사설 / 慈善과 의무
  • 원불교신문
  • 승인 1973.11.25
  • 호수 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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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의 달에 부침
 첫눈이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노라면 이제 겨울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려운 동포들이 이 겨울을 어떻게 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해마다 자선의 달이 있고 어려운 동포를 돕자는 운동은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의 생활도 점차 향상되어 가고 있고 「어려운 생활」의 기준도 많이 달라졌다.
 따라서 옛날처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참상은 지금에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알며 비록 있다 해도 극소일 것으로 추측한다. 다만 우리의 이상은 모든 동포가 고루 잘 살기를 염원하는 것이며 그 잘산다는 어휘 또한 현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동포는 역시 상존하는 것이며 우리의 관심 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다행히 금년에는 커다란 참화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며 따라서 이재민의 수도 적었지만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동포들에게 무언인가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심정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자선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강자가 약자에 대한 우월적인 입장에서 베푸는 동정이라고 풀이된다. 그것은 분명히 「너」를 인식하고 우리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어휘인 것 같다. 「우리」란 한 울안에 있는 사람 즉 한 집안 식구를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세계를 한 집으로 생각할 때 하늘은 「한울」이 되는 것이며 그 크나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울이」즉 「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선이라는 말은 「우리」의 세계에서 쓰는 말이기보다는 「너」와 「나」의 세계에서 쓰이는 말일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어려운 동포는 바로 우리의 한 집안 식구의 어려움이요, 혈육의 아픔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나의 쓰라림이요, 아픔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은 자선이라는 말을 쓴다 해도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서 그 태도가 엄연히 구별될 것이기 때문에 본란은 우리의 입장에 서서 자선의 있어야 할 방향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자선사업에 대한 호응은 잉여소득의 일부를 거출하는 것이 아니요, 우선 자기가 쓰는 소득 또는 소유물의 일부를 무조건 희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쓸 것을 모두 제하고 소용없는 금품을 떼어 내서 하는 자선이 아니라 우선 자기가 먹는 곡식의 일부를 떼어내고, 우선 자기가 입는 의복의 한 벌을 쾌척하며 용돈의 일부를 무조건 할애하는 정신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동포를 돕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낡은 것이나 못 쓸 것이나 처박아 둔 것을 찾아내어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것을 그대로 나누어 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 그것은 동포보은의 길임을 깊이 인식하는 행위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애가 다 하나의 존재로서 영위되는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 하나로서는 살 수 없고 우리가 어울려서 사는 세계에서 생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 은혜 즉 동포의 은혜를 알고 이에 보답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개인에게 어떠한 고마움을 느끼면 그에 대한 보답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직접 베풀어지는 한두 가지의 고마운 일보다 더 큰 포괄적인 동포은은 못 느끼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인간은 제 자신이 인식하건 못하건 모든 동포의 어울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보답은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셋째 이러한 사업은 지정된 기간에만 있을 일이 아니요, 자선의 달은 다만 그 강조월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남이 알아주건 몰라주건 상관없는 일이요, 남에게 알리려고 애쓰거나 안 알아준다고 불행할 일도 아닌 오직 의무감에서 우러나는 행위이어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해 모든 동포가 잘 살게 되고 모든 동포의 마음속에 훈김이 감돌 때 나와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이 미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그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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