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범 사람이 호의호식은 다 바라고 즐겨하는 바이지만 여기 와서 사는 뜻은 사람의 뜻을 찾고자 하는 일이로다.
○ 효도라 하는 것은 슬하에서 의식만 잘 봉양하는 것이 큰 효도가 아니다. 그 부모의 뜻을 잘 받들고 교육을 잘 받아서 입신양명하여 그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큰 효도가 되는 것이다.
○ 마음을 닦아 밝히고 밖으로 모든 일을 절차 있게 살피고 때를 잃지 않고 행하고 보면 이는 부귀와 빈천을 아는 사람이요, 선후와 시종을 아는 사람이요, 시비와 이해를 아는 사람이다.
○ 우리는 칭찬을 받는다 하여도 그 칭찬하는 말을 두려운 스승으로 삼아야 하고, 그 칭찬하는 말이 언제까지 남아서 참 칭찬이 되게 할지어다.
○ 그 배우는 것만을 공부로 알지 말라. 만일 글만 알고 행하는 것이 없으면 배운 글이 쓸모가 없는 것이다.
○ 낮에는 자기의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고 마음 길을 일일 시시로 살피고, 집안에 오면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하여 포식 난의 금수자를 면할지어다.
<약력>
○ 1876년 2월 6일 경북 김천군 석현면 하원에서 출생.
○ 원기 9년 4월 29일 송벽조 연원으로 입교.
○ 원기 10년 11월 1일 출가.
○ 원기 13년 서울 교무.
○ 원기 15년 2월 23일 부안에서 열반.
○ 원기 18년 4월 26일 훈산 법호 증여 받음.
<생애>
원불교 탄생지인 전라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경북 김천군 석현면 하원리 출생이신 훈산 이춘풍 선생님은 이씨 가문의 독자이셨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뛰어난 재주는 한문공부에 문리를 얻으셨고,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치고 마는 유가의 선비로서 유학의 길을 닦으셨던 것이다.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은 집안 어른들의 굽은 일을 충간 하셨고, 비록 웃어른일지라도 어린 춘풍 선생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춘풍 선생님의 성격은 한 말로 곧은 것 하나 뿐이었다.
또한 선생님의 글 읽는 소리는 마치 공중에서 학이 우는 것처럼 옥을 구르는 듯 청아하고 아름다워 사람들은 선생님의 글 읽는 소리 듣기를 즐겨하였던 것이다.
열 여섯 살이 되시던 해에 성산 정씨 가문으로 혼인을 하셨고, 이어 딸만 여섯을 두게 되니 엄격한 유가의 풍속을 초월하고 절에 가서 불공과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바지무릎이 다해지도록 드린 불공과 기도는 아랑곳없이 줄곧 딸만 둘을 더 얻으셨다. 이 두 따님이 바로 경순 선생님과 정화 선생님이시다.
이때에 고종사촌이신 정산 법사님께서는 대종사님을 만나 그 가족이 영광으로 이사를 하졌었다. 문중에서는 사도에 빠졌다하여 시비가 분분하였고, 그래서 춘풍 선생님께서 다시 모셔오려고 영광 땅을 찾게 되었다.
구산 송벽조 선생님의 안내로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뵙는 순간 반갑고 황홀해져서 몇 십 년 그립던 부모를 만난 것처럼, 공자님을 뵙는 것 같으셨다고 한다. 대종사님의 법문을 듣고 바로 입교를 하셨고 전무출신 하실 것과 이사 오실 것을 결정하셨다.
근엄한 유가의 풍속과 가문의 만류를 회피하시려 아들 하나 얻으려고 이사를 한다고 하시고는 집과 전답 등을 대강 정리하고 부안으로 이사를 하셨다.
굳굳한 결단력과 숙세의 인연이 아니고는 대종사님을 뵈올 수도, 출가하실 뜻도 세우지 않으셨을 것이다.
전무출신 생활에 접어들어서는 주로 대종사님의 법문을 수필 하셨고, 제1회 익산총부 선방 교무와 서울지부 교무 등 4년의 출가생활을 하셨다.
선생님은 생사가 둘아 아닌 경지에 이르기까지 낙도를 하시다가 55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