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열망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자 누구인가

지난번 추계 교역자 훈련 때와 교정위원회 때, 착하기만 하고 인내를 미덕으로 삼아 오던 다수의 교역자들이 교단 현실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토로했다.
그것은 결코 교단 행정에 대한 비판이나 불평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교단의 장래를 생각하고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을 널리 펴야겠다는 투철한 서원과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적절할 호소였다.
각종 훈련문제, 남자교무의 일선교당 활용문제, 남자 교역자의 품위와 복장문제, 교정위원회의 분과별 구성문제, 중앙교의회이 실질적 운영문제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교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대산 종법사의 서원과 범교단적 합력으로 거대한 훈련원 건물이 신축되고, 훈련원이라는 새 기관이 발족했고, 거기다가 교정원에는 훈련부까지 신설되었다. 따라서 훈련에 대한 교단의 기대가 그만큼 컸음에도 불구하고 금년 여름의 청년훈련이나 추계 교역자 훈련이 한결 같이 엉뚱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모처럼 어려운 기회를 틈내어 신심을 크게 살아나기를 기대하며 총부로 모여드는 청년회원, 1년 중 교화하기에 황금 같은 시기에 많은 비용을 들여 참석하는 일선 교무들에게 허탈감을 주지 말아달라는 그 절절한 호소를 귀담아 듣는 자 누구인가?
전체 교역자 중에서 30%가 넘는 남자교무들이 일선 교당에서 별로 봉직하지 않고 대다수가 특정기관에 집중돼 있는데 이들 남자 교역자들을 일선교당에 활용할 길은 과연 없는가? 물론 남자 교무들이 갖고 있는 개인적 상황, 또 일선교당에서 남자교무가 활동하기 어려운 여건도 물론 이유는 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해결 불가능인 것은 아니다. 일선교당의 여건은 조성하면 되고 기관에 근무할 수밖에 없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상황은 객관적으로 평가해볼 때 시정돼야 할 경우가 많다. 정책적 유도와, 남자교역자들이 교역자 본연의 자세를 찾고, 여자교역자와 재가 교도들의 적극적 협조가 뒤따른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 교역자들의 자유로운 복장은 시대사조에 호응하고 미래지향적인 교단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긍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복장의 자유화가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타락 세속화 현상이 나타난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복장이 자유스러울수록 내면적 자기 수행과 인품의 도야는 더욱 철저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복장의 자유화에 따른 내면적 자기 수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복장을 통일해서라도 교역자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여자 교역자들의 주장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역자의 품위를 유지하자는 우정 있는 충고일 것이다.
교정위원회 법에 의해서 분과별 교정위원을 구성하고, 분야별로 교정을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지금까지 교단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해결하기로 합의를 보았으나 그 뒷 결과가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 단적인 예로 지난 해 4월 대대적인 교무 이동이 단행되어 큰 진통을 겪고 일시적 이동은 지양하고 단계적 이동이 필요하다고 입 모아 말했으나 한 해도 못 가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교역자 훈련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교의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라는 재가 위원들의 주장은 벌써 한두 해 된 것이 아니다. 1년에 한 차례 있는 중앙총부 예산안 심의도 겨우 두 시간 정도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며칠 전에라도 예산안을 보내주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회의 시간도 바쁘다는 핑계로 적당히 넘어가지 말고 최소한 하루라도 잡아서 진지하게 교단사를 의논하자는 주장은 열 번 백 번 옳은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총부 당국은 못하는 것인가, 아니하는 것인가. 그들 재가 위원들에게 한 씨의 음식대접보다는 교단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거기에 응해주는 성의 있는 태도를 가질 수는 없는가.
이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 해답해 줄 자 누구인가? 귀담아 들어줄 자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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