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법사는 화랑세속오계의 한 조목으로 살생유택을 내걸었다. 불가에서 금하는 살생을 세속에 맞추어 「有擇」으로 완화한 것이다. 생명은 아무리 미물곤충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함부로 타의 침해를 받아도 좋을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인간이 그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보호하거나 공중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침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불가피의 한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린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무의미하거나 과잉된 살생을 삼가야 할 것이다. 살생을 즐기는 사람의 성품은 자연히 거칠어지고 잔인해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말뚱말뚱 쳐다보고 있는 그 동물의 애련한 눈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생명을 범할 수 있는 심정은 벌써 누구에게나 간직되어 있는 측은지심이 마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잔인성의 움이 트고 있음을 말할 수 있으리라. 하물며 인명에 있어서랴.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관례이다. 시체를 치운다는 것 이상의 장엄한 뜻을 가지고 거행되는 것이 장례식인 것이며 다른 어느 동물의 죽음과도 다른 차원에서 심각하고 애절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단순한 동물적 존재가 아니며 우주의 진리를 추구하여 자신의 안에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존귀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이기에,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불가에서 말하듯이 성불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명은 고귀하다 할 것이다. 그 고귀한 인명이 경시되고 함부로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이종대, 문도석 양인이 저지른 한 범행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자기의 처자식을 자기의 소유물 처분하듯이 간단히 사살하는 그 잔인성은 천인공노할 소행이거니와 그것이 결코 前記 양인으로 인하여 돌발한 흉악범행인 것이 아니라 누적된 사회의 악풍조가 한 분화구를 통하여 터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휴전이라고는 하나 전쟁 중단상태에 있으며 호시탐탐 노리는 적을 눈앞에 둔 우리 사회가 살벌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거니와 이 살벌한 기운이 그릇되게 번져 폭행, 살상 등을 다반사로 알게 되는 것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의 마음속에 자비의 바람을 불어넣어 꽁꽁 얼어붙은 냉정을 봄눈 녹이듯 녹여내어야만 사회의 안정과 세계의 평화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신체발부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이를 훼상하지 않는 것을 효의 비롯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신체가 부모의 은혜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 은혜에 보다하여야 할 신체를 훼손하지 말자는 것일 것이다. 은혜로 말하면 어찌 부모의 은혜뿐이겠는가. 그 생육과정에서 그에게 쏟아진 천지나 동포나 법률의 막중한 은혜도 도외시될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은혜 속에 젖어있는 생명과 신체가 결코 그 사람 개인의 소유물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타인의 생명에 대하여 외경의 念을 갖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스스로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처분의 자유가 없는 것임을 우리 누구나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몸이 인연과보에 의한 업의 결정이라 하더라도 이 생명 다하도록 후생 길을 닦고 성불의 도정을 착실하게 밟아가야 할 몸인 것이다. 천업은 면할 수 없다 손치더라도 금생에 짓는 업은 자기의 자유에 맡겨져 있는 것이어늘 어찌하여 자타의 명을 재촉하여 이를 방해하고 무서운 죄과를 범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남을 책하기 전에 나 자신을 책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는 거칠은 살인성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우리를 통하여 따스한 바람이 불어나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러하여 이 땅위에 하루바삐 유형무형의 생명침해가 없어지도록 다 같이 기도하며 이미 애처롭게 죽어간 모든 넋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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