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취약지구>

고속도로가 힘차게 뻗어나고 있는 우리나라에 아직도 사방 백리 안에 철길이 없는 읍이 있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인가를 쉽사리 생각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인구 2만여 명의 경남 함양읍은 공업화의 혜택을 비교적 많이 입었다는 경상도에서는 근대화의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소외된 산골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강원도 이상으로 옛날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근대화를 촉진하는 철길과 고속도로가 함양에서는 너무나 멀리 있다. 함양서 남원까지가 42Km, 진주까지가 64Km, 폭이 좁고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통한 신작로가 있을 뿐이다.
함양은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하여 아직도 근대화의 길은 멀다. 서부 경남 일대는 강원도 못지 않는 산간지대, 그래서 농토도 부족하고 상업이나 공업 운수업이 발달할 여지도 별로 없다.
따라서 함양읍은 가난하다. 주민의 80% 이상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대개가 영세농이다. 백만 원 이상의 재산이라면 부유한 층에 속할 정도다. 거리에는 흥청거리는 경기도, 미니 아가씨도 눈에 별로 뜨이지 않는다. 한국의 옛 모습을 아직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특수사정은 종교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 취약지구인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종교는 별로 힘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함양읍에는 원불교를 비롯하여 천주교· 예수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성덕도· 불교 등 7개의 교당이 있으나 하나같이 교세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주민들의 가난과 종교 무관심 지대라는 점이다.
<청년들의 힘>
함양 땅에 원불교가 처음 발을 들여놓기는 원기 42년의 일이다. 다른 교당과는 달리 청년들과 학생들의 힘에 의해서 교당이 설립되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니까 함양교당의 창립 유공인들은 일반 교우보다 청년 학생들이 더 많다.
현재 전무출신으로 원광사 총무로 있는 박정기씨가 함양농고를 졸업할 무렵, 그러니까 원기 42년에 박정기씨와 그의 친우 몇몇이 함양에 원불교를 세워보자고 뜻을 세운 것이 그 출발점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함양 국민학교 교실을 빌리고 김정용 선생을 초청하여 처음 교리강습회를 열었다.
당시 운봉지부 송영봉 교무가 와서 출장법회를 봐 주었고, 이듬해에는 역시 운봉지부 신제근 교무가 출장교화를 하게 되었다.
그 때 학생들은 그들의 정열을 원불교에 불살랐던 것이다. 빈주먹으로 오직 학생들의 뜨거운 피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 지부장인 정대연씨(69세)가 당시 함양 교육감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의 열의에 호응해서 법회장소를 빌리는 일에서부터 여러 가지 면에 많은 지도와 협조가 있었고, 주무인 이근수화씨(61세)가 출장 나온 송영봉 신제근 교무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러다가 원기 45년에 전경화씨가 초대 교무로 부임하면서 교당으로 발족했다. 정대연 지부장이 사랑채를 희사하여 법당으로 쓰게 되었고, 일반 교우보다는 청년들이 주축이 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미온적인 읍민들의 태도를 무릅쓰고 전경화 교무는 3년간 교화에 힘썼고 함양읍에서 20리 떨어진 지곡면 개평리에 출장교화를 하여 그것으로 옮겨갔다.
<이어지는 얼>
원기 48년 5월에 박덕준 교무가 새로 부임해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제적 기반은 역시 확립되지 못했고 일반 교우는 별로 많지 않았다.
박덕준 교무는 지금까지 조용한 가운데 교화에 힘써왔다. 처음 교당 창립에 주역을 담당했던 청년들은 대개가 결혼을 하고 직장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인적 자원, 경제 기반이 모두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교세의 발전도 천신만고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함양에 교당이 세워진 지 10년이 되었다. 눈부신 발전은 없었으나 터전은 차츰 다져져 갔다. 지난 7월에는 120만원으로 교당을 마련하여 이사하게 되었다. 대지 215평에 20여 평의 법당을 구입하기에는 많은 사람의 정성이 모였다.
그 가난 속에서도 교당에서 얼마의 기금을 저축했고, 교우들이 힘을 합했으며, 이웃 교당에서도 도와주었다. 더욱 기억할 만한 것은 청년교우 박도일(31)씨의 협력이다.
박도일씨는 현재 서울에서 한의를 개업하고 있는데, 교당 창립의 주역이었던 청년 그룹의 다음 세대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당에서 백일기도를 통하여 정신적 재생을 얻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젊은 사람이면서도 종교심이 대단했고 인격의 성숙에도 노력해왔다. 이번 교당 구입에도 상당한 경제적 협조를 하게 된 것은 그의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오직 그 투철한 종교심 때문이었다.
창립 당시 청년들의 얼을 이어받아 현재 교당 일에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하는 청년 한상민씨(30세)는 박도일씨와 절친한 친구로서 전무출신 못지 않은 일꾼이다.
진주농대를 나와서 농촌을 지키고 있는 흙속의 순교자인 그는 아직 미혼으로서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흙과 씨름을 하고 있으며, 교당 일에도 적극적이다. 이번에 교당을 구입하고 2개월여의 수리에 앞장서서 일하고 감독했다. 이와 같이 그는 가정에서도 일 잘하고 교당에서도 공부와 일을 잘 하는 모범 청년이다. 생활하는 종교인의 표본 같은 인물이라 하겠다.
한상민씨의 부친 한태익씨(57세)는 부지부장이고, 모친 임도국씨(53세)는 주무로써 모범적인 종교가정을 이루고 있다. 박덕준 교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제일 먼저 찾아가서 상의하는 곳이 그의 가정이다.
사회의 변동에 따라 함양교당 창립 당시의 청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으나, 한상민씨· 박도일씨· 강인표씨(35세) 등이 그 정신을 이어 받아 교당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불교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함양은 현재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이다. 대도시로 노동인구가 흘러가고 있다. 아직도 농업시대의 생활양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시사회의 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다. 순박한 한국 농촌의 풍경, 인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가난하다.
함양교당 창립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교당창립을 위해서 꼭 경제적 여건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청년들의 정열과 교역자의 노력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을 때 교당 설립은 가능하다.
함양 같은 지방에서는 교우들의 경제적 희사로 어떤 사업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보다도 원불교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 원불교는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즉 원불교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물어볼 때 우리는 떳떳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화자세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역자는 정신적 교화로서 끝날 수 없는 것이다. 교역자는 정신의 스승이면서도 생활개선의 지도자까지 겸해야 할 것이다.
즉 교역자는 여러 가지 생활의 기술을 습듯하여 기술지도를 통한 생활개선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또한 국가 시책과 발맞추어, 교화활동이 원불교의 테두리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국가 운동 내지 사회운동에까지 연결될 수 있는 교화활동이 될 때, 원불교는 분명 한국사회에 어떤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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